<분수대>首丘初心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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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재소자들은 정치범과 일반 잡범으로 나뉜다.이들은 가슴에 단번호로 구별한다.나는「다」번이었다.남조선 국방군 포로중 전향하지 않은 사람을 뜻한다.하루 16시간씩 일했다.일을 다하지 못하면 밥을 주지 않았다.』반세기에 걸친 탈출 시도 끝 에 마침내 돌아온 국군 소위 조창호(趙昌浩)씨의 참혹한 북한 교화소 생활 증언이다.
52년에 포로로 잡혀 13년간 강계 교화소 생활을 마친 趙소위는 출소후 자강도 화풍.호화탄광에서 또 13년간 지하 막장 생활을 하다가 진폐증 환자로 풀려난다.폐인이 다 된 그가 죽어도 조국 가서 죽자는 수구초심(首丘初心)일념으로 사투 77시간을 헤매며 결국 조국 품으로 돌아왔다.
빠삐용처럼 질긴 그의 생명력과 탈출을 향한 집념은 어디서 생겨난 것일까.도저히 인간으로서는 살 수 없게 하는 교화소 생활과 감옥과 진배없는 지하막장 생활이 그의 탈출을 도왔을 것이다.전향하지 않은 국군 포로로서는 감내할 수밖에 없 는 혹독한 인간이하의 대접을 받으면서 남쪽에 대한 동경은 더욱 높아졌을 것이고 비록 처자식이 있다지만 도저히 뿌리를 내리지 못하게 하는 북의 생활은 그의 탈출 각오를 더욱 강하게 만들었을 것이다. 조창호씨같은 전쟁 포로가 어찌 한두명뿐이겠는가.전쟁이 끝난지 반세기가 돼가는 지금껏 북한 주민으로 수용하지도 않고,그들이 원하는 곳으로 보내지도 않으면서 가난과 고통속에서 살아가는사람이 얼마나 될 것인가.
물론 우리 사회에도 미전향 장기수가 있다.그러나 이들은 趙소위같은 정규군 출신이 아니다.대부분 간첩활동을 했거나 빨치산 출신이다.정규군이었다면 자의에 따라 북으로 송환됐거나 제3국 또는 이땅에서 지난날 악몽을 잊고 뿌리 내리고 잘 살고 있을 것이다.그런데도 이인모 노인같은 빨치산 출신을 93년 북으로 송환까지 했건만 남북간 화해는 좀체 열리지 않고 있다.趙소위같은 미전향 정규군 포로를 송환받기 위한 대화와 교섭의 창구를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열어 수구초심의 한(恨)을 풀어줘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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