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응에 인신공격… 反지성의 ‘학내 정치’ 불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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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대 후반 직선제는 민주화의 상징적 코드였다. 대학총장 직선제도 그런 시대적 요청에 따라 탄생했다. 그렇게 20년이 흘렀다. 그런 총장 직선제가 거센 도전을 받고 있다. 고려대 재단은 2월 이필상 총장이 논문표절 문제로 물러난 뒤 차기 총장을 직접 지명하겠다고 나섰다. 정창영 총장이 부정 편입학 파문으로 낙마한 연세대에선 교수들이 직선제 존속 여부를 놓고 투표를 했다. 서울대 일부 단과대학은 간선제로 바꿨다. 현실 정치 못지않은 ‘학내 정치’가 상아탑을 멍들게 하고 있다.

서울 관악구 선거관리위원회 직원들이 지난해 5월 서울대 총장 선거 1차 투표 결과를 집계하고 있다. [연합뉴스]


“A후보는 친일파의 후손이다. 그런 사람이 총장이 돼서는 안 된다.”

“B후보와 술집 마담이 단둘이 시간을 보내는 모습이 목격됐다.”
최고 지성으로 불리는 서울대 총장 선거 때마다 이런 인신공격과 흑색선전이 횡행한다. 지난해 서울대 총장선거에선 ‘1조원 재정확충’ ‘세계학회 본부 5개 이상 확보’ ‘교직원 아파트 500가구 추가 건립’ 같은 비현실적이거나 선심성 공약이 난무하기도 했다.

지난해 말 고려대 총장선거가 한창 진행될 때 일부 교수 집에는 사과 상자나 선물 꾸러미가 배달됐다. 고려대의 한 교수는 “선거 때마다 이런 일이 비일비재하다”고 말했다.

지방대학은 더 심하다.

모 지방 국립대에선 총장선거가 10개월 이상 남았는데도 일부 출마 예정자들이 골프 접대나 향응을 제공하고 학연·지연 등을 앞세워 세(勢) 확산에 열을 올리고 있다. 또 다른 지방대에서는 총장 후보의 공약을 총학생회가 공개적으로 비판하자 이 후보가 음모설을 제기하면서 싸움이 벌어졌다. 제주교대는 교수들이 파벌을 나눠 싸우는 바람에 2005년 한 해 동안 총장을 뽑지 못했다.

현재 총장 직선제를 시행하는 대학은 국공립대 45개를 포함해 60여 개다. 이들 대학에서는 선거 때마다 크고 작은 잡음이 끊이지 않는다. 1988년 연세대를 필두로 직선제 바람이 불기 시작했고 91년에는 법을 바꿔 국공립대가 직선제를 제도화했다.

직선제는 그동안 재단의 독단과 전횡을 견제하고 대학의 독립성을 확보하는 데 기여했다. 그러나 선거가 과열되면서 정치권 뺨치는 문제점을 드러내고 있다. 총장에 당선되면 주요 보직 교수를 자기 사람으로 채우는 일이 다반사다.

지난해 9월 서울대 교수협의회(회장 장호완)가 발간한 ‘서울대 총장선거 보고서’는 직선제의 문제점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보고서의 한 토막.

“일부 단과대학에서는 유력 후보자에게 특정한 정책을 시행할 것을 조건으로 내세우고 지지를 약속했다는 소문이 돌았다. 또 소집단이 후보를 불러놓고 자신들의 숙원사업을 들어주면 지지하겠다는 식의 ‘흥정’을 한 사례가 있었다.”

보고서는 “일부 후보자의 사적인 문제에 관련된 비방이 소문으로 떠돌았다”며 “그런 비방이 교직원들에게는 상당한 영향을 끼쳤다”고 지적했다.

올 2월 고려대 이필상 총장이 표면적으로는 논문표절 시비 때문에 물러났지만 ‘학내 파벌의 희생양’이었다는 시각이 강하다. 선거 때 이필상 총장과 대립했던 세력이 의도적으로 정보를 흘려 낙마했다는 것이다. 유력한 후보였던 이기수 당시 법대 교수 또한 표절문제로 중도 하차했다. 당시 재단으로 익명의 진정서가 전달됐다고 한다. 한 번의 총장선거에서 두 명의 유력인사가 잇따라 낙마한 것이다.

지난해 말 고려대 총장 선거 때 어윤대 전 총장이 부적격 후보로 몰려 탈락했다. 어 전 총장의 측근은 “교수들이 어 총장의 영어 강의 방침에 반발해 탈락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은 파벌 싸움의 희생양”이라고 주장했다.

인제대 이경호 총장은 “대학을 잘 이끌어 나가려면 교수사회의 협력을 잘 이끌어내야 하는데 직선제 과정에서 골이 깊게 팬다. 이 때문에 상대 측 교수들에게서 협조를 받기 힘들어져 학교 발전이 늦어지게 된다”고 말했다.

직선제의 장점보다 폐해가 더 부각되면서 직선제 폐지 움직임이 본격화하고 있다. 연세대는 최근 정창영·김우식 두 전 총장이 임기를 채우지 못했는데 이를 두고 “잘못 뽑았다”는 자성의 분위기가 형성되고 있다. 연세대 교수평의회는 최근 총장 선출 방식을 놓고 투표를 했고 여기에서 3대1 정도로 직선제 지지자가 많았으나 간선제도 무시 못할 정도로 힘을 얻었다.

익명을 요구한 연세대 교수는 “내년 2월 1일까지 새 총장을 뽑아야 하는데 간선제로 전환하기 어렵다 보니 직선제 지지자가 많이 나온 것”이라며 “교수들 사이엔 간선제를 지지하는 사람들이 많다”고 전했다.

이미 직선제를 포기한 대학들이 많다. 이화여대·홍익대·서강대·한양대 등 주요 사립대학들이 2000년대 들어 간선제나 재단 임명방식으로 바꿨다. 서울대 공대도 9월 강태진 학장을 간선제로 뽑았다. 추천위원회에서 복수로 추천하면 총장이 임명하는 방식이다.

고려대 재단은 지난달 중순 교수들이 총장 후보를 선출하는 예비심사를 전격 폐지하고 총장추천위원회에서 심사한 뒤 재단이 임명하겠다고 발표했다.

하지만 간선제로 바꾸자는 주장에 동의하지 않는 교수들도 많다. 직선제가 문제가 있긴 해도 간선제로 바꾸면 재단의 전횡을 제어하기 힘들어질 것이라는 이유에서다. 고려대 교수평의회 의장 김민환(언론학부) 교수는 “직선제를 폐지하자는 데는 절대 동의할 수 없다. 재단이 선진화되지 않은 상태에서 재단이 총장을 임명하는 것은 허용할 수 없다”고 말했다.

이원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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