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지탱한 건 학력 아닌 열정”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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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씨가 국내외에 흩어져 있던 보각국사비 탁본을 35년간 모아 만든 ‘박영돈 집자본’을 설명하고 있다. [사진=안성식 기자]

“늙은이가 표창 받아 뭐하나. 학력이 부족해도 뭐든 열심히 하면 이룰 수 있다는 것을 알리는 계기나 됐으면 좋겠어요.”

 다음달 4일 대통령 표창을 받는 재야 서지학자 박영돈(71)씨. 그는 박사도 교수도 아닌 이름없는 재야 서지학자다, 남들은 그를 ‘선생님’ 또는 ‘서지학자’라고 부르지만 그의 학력은 전북 완주 화산초교 졸업이 전부다. 경남여고 정원사로 5년, 부산은행 수위로 30년 근무한 게 경력의 전부다.

 이런 그가 부산대 채상식 교수, 숙명여대 정병삼 교수와 함께 지난해 경북 군위군 인각사의 보각국사비(보물 428호)를 복원했다. 인각사는 보각국사 일연(一然·1206~1289)이 『삼국유사』를 집필하고 열반한 곳이다. 이 비는 일연의 행적을 기록한 비다. 고려 충렬왕 21년(1295) 당시의 문장가 민지(閔漬)가 지은 문장을 왕희지체로 집자해 만들었다. 총 4050자, 집자하는 데만 7년이 걸렸다는 기록이 있다.

 박씨는 “『조선왕조실록』 ‘광해군일기’에 ‘보각국사비를 탁본해 보내라’는 명나라의 요구가 적혀 있을 정도로 이 비는 금석문의 정점”이라고 평가했다. 원래 높이 3.9m의 웅장한 비석이었지만 몸체가 동강나고 비문은 10% 정도만 남았을 정도로 훼손이 심했다.

 박씨는 35년 동안 국내외에서 보각국사비 탁본 30여종을 찾아내 복원의 기틀을 마련했다. 이른바 ‘박영돈 집자본’이다. 1971년 청계천에서 우연히 보각국사비 탁본 일부를 산 것이 시작이었다.

 “당시까지 일연스님의 행적은 알려진 바가 없었어요. 열쇠가 보각국사비인데 남아 있는 내용이 별로 없다는 거예요. 그런데 아무도 이 작업을 안한다는 말을 듣고 내가 직접 해보기로 마음먹었죠.”

온통 한문으로 된 비석 복원은 정말 어려웠단다. 그를 전문가로 만든 것은 학식이 아니었다. 집념과 열정으로 점철된 35년이라는 세월이었다.

 퇴근 후에 자전을 뒤적이는 것이 일상이 됐다. 해석을 하고 글자를 맞추다 막히는 부분은 전국의 대학교수 등 전문가를 직접 찾아가서 물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업적을 “머리가 아니라 발로 한 일”이라고 말한다. 주말에는 탁본 소유자를 찾아 전국을 누볐다. 그가 보각국사비를 복원 중이라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해외에 있는 사람들이 도서관에 소장돼 있는 희귀 탁본을 복사해 보내주기도 했다.

 온 나라가 학력 위조의 홍역을 치른 직후라 초등학교 학력의 그는 특별히 할 말이 있을 것 같았다.

 “인생을 사는 데 학력이란 게 그렇게 중요하지 않아요. 초등학교만 졸업해도 이런 일을 할 수 있다는 걸 사람들이 알았으면 좋겠는데. 지금처럼 학벌을 중요하게 따지는 사회가 변하지 않으면 앞으로도 학력 위조는 계속 일어날 것입니다.”

권근영 기자, 사진=안성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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