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권영빈 칼럼] 절망, 그러나 희망은 있다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31면

생물교사 이태원은 스승 최기철 교수의 영향을 받아 민물고기를 공부하기 시작했다. 이때 그는 우리나라 고전에 나타난 기록들을 접하면서 물고기 이름의 어원과 역사 관련 기록에 관심을 쏟던 중 한권의 책을 만나게 된다.'현산어보(玆山魚譜)' 번역본. 조선조 실학파였던 정약전이 2백여년 전에 쓴 우리나라 최초의 해양생물학 서적이다. 이 책의 발견은 그의 표현대로 인생의 전환점이 된다. 그 후 7년간 현산어보에 나오는 어류들의 실체를 찾아 신지도.우이도.흑산도를 찾아 헤맸다. 정약전은 대체 어떤 인물이기에 이런 미물에 대한 관심을 쏟았고 이를 이처럼 정확하고도 미세하게 후세에 남겼는가. 그는 방학만 되면 미제 사건을 찾아 헤매는 수사관처럼 기록을 모으고 흑산도 주변 구석구석을 훑고 다녔다.

*** 7년 발품 팔아 정약전 魚譜 재조명

정약전은 다산 정약용의 친형이다. 정조대왕 사후 정쟁에 휩싸이며 이른바 황사영백서라는 천주교 탄압사건과 연루되면서 형은 신지도.우이도.흑산도로, 아우는 장기.강진으로 흩어져 유배를 떠난다. 정약전은 14년이라는 긴 유배의 세월을 흑산도 주변의 섬을 떠돌며 서당을 지어 섬마을 아이들을 가르치고 흑산도 근해의 해양생물을 정리한 현산어보를 완성한다. 유배가 끝난 동생이 찾아온다는 소문을 듣고 우이도로 마중 나갔다가 그리던 동생도 만나지 못한 채 59세의 나이로 한 많은 세상을 떠난다. 교사 이태원은 정약전의 14년 유배생활 절반을 투자해 정약전이 기록했던 어보를 현대어로 재생하면서 그 어류들의 실체를 하나하나 찾아 2백년 전 물고기를 오늘의 물고기로 복원하고 있다. 그 7년 각고의 결정체가 '현산어보를 찾아서' 전 5권이다.

한반도의 정반대에 위치한 남극. 남위 62도13분.서경 58도47분, 킹조지 섬 남서쪽 바튼반도의 바닷가에 세종기지가 세워져 있다. 추위와 얼음밖에 없는 이 빙하의 땅에 남극의 비밀을 캐기 위해 과학자들이 모인 것이다. 해양학자는 해수온도와 남극의 해양특성을 연구하고, 해양생물을 연구하는 사람은 조개.성게를 채집해 중금속의 양을 측정하기도 한다. 지구물리학자는 해저 퇴적물을 채집해 화산폭발이나 기후변동 같은 지구 환경변화를 밝혀내려 한다. 지질학자들은 자갈과 토양과 화석을 채집해 남극의 지층구조를 연구한다.

지질학자 장수근은 1985년 남극탐험대를 시작으로 88년 세종기지 완성 후 1차 남극 월동연구대 대장을 비롯, 북극 다산기지와 남극 세종기지를 오가며 극지 연구에 몰두하고 있다. 그가 남극탐험의 역사와 세종기지 이야기를 담은 '남극탐험의 꿈'을 한권의 책으로 냈다. 그는 서문에서 이렇게 적고 있다. "남빙양의 눈보라 속에서 매서운 추위와 싸우고 있는 동료들을 구하기 위해 기지를 나선 전재규는 타고 가던 고무보트가 높은 파도로 뒤집어지면서 얼음바다에 빠지고 말았다. 그리고 남극 바다는 피지도 못한 그의 젊은 영혼을 사정없이 거두어 갔다. 이제 나는 그의 영혼이 깃든 남극 세종기지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자고 나면 온갖 비리가 터져나온다. 눈만 뜨면 상대를 비난하고 욕질하는 우리의 정치 지도자들을 보며 지금껏 살아온 지난날이 허망하게 느껴진다. 국회는 국민을 절망케 하고 감옥은 이들 왕년의 지도자들로 넘쳐나고 있다. 이 나라에 과연 희망이 있는가.

*** 절망만 주는 정치 지도자와 딴판

반도의 끝자락 섬들을 찾아다니며 조상이 남긴 어류연구를 재조명하는 젊은 교사의 그 말없는 실천 속에서 우리는 희망을 본다. 평생을 극지 연구에 몸 바치고 또 동료를 구하려다 숨진 한 젊은 지구물리학자의 맑은 영혼이 우리 주변을 감싸기에 절망하지 않는다. 어디 이뿐이겠는가. 전국의 딱정벌레를 찾아 10년간 1천여종을 채집하고 표본을 만든 딱정벌레 같은 연구자 한영식이 있는가 하면('딱정벌레 왕국의 여행자'필자), 평생을 소와 더불어 살고 연구하며 마침내 세계 최초로 난자에 줄기세포를 배양해 난치병을 고칠 길을 연 황우석 교수팀이 있다. 이 나라 지도자는 세치 혀로 기만과 협잡을 일삼는 그들이 아니다. 과학을 위하여, 다중을 위하여 말없이 헌신하는 생물교사, 지질학자, 딱정벌레꾼, 황소 같은 황교수가 참다운 지도자다. 이들이 존경받고, 이들이 빛을 보는 사회라야 희망이 있고 미래가 있다. 절망하기보다 희망을 찾아 나서자.

권영빈 편집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