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평>정치개혁과 복고적 흐름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5면

아마 4,5년 후『아! 그때가 개혁(改革)의 전기(轉機)였는데…』하고 아쉬워할 날이 올지도 모른다.요즘같이 정치.사회적으로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서 김영삼(金泳三)정권의 개혁 성과에 의문을 표시하며 과거 정권들의 통치 능력에 예찬을 보내는 복고(復古)주의적 정치 무드를 접하면서 우리는 지금 그와 같은 불안의식을 강하게 느끼지 않을 수 없다.작년초 金정부의 탄생은 지난 30여년간 정통성(正統性)부재(不在)의 한국 정치를 본궤도에 진입시켰다는 점에서 획기적인 정 치발전이었다.
金정부 출범을 계기로 많은 국민은 해방 후 계속돼온 정치.행정.경제의 왜곡된 구조와 관행들이 정치적 리더십에 의해 고쳐질수 있으리라는 기대감에 부풀었다.
어떻게 보면 이와 같은 기대감은 탈냉전(脫冷戰)이라고 하는 세계사적 흐름 속에서 결코 우연적 현상은 아니었다.그것은 오히려 시대적 요청이었으며,개혁은 이 시대적 요청에 대한 상징적이고 현실적인 해답이었다.개혁 입법과 사정(司正)을 통한 구조적비리.폐습의 척결로 오랫동안 당연시되어왔던 구질서(舊秩序)들이무너져 내리기 시작했으며,이 결과 金정권은 국민으로부터 높은 지지를 확보할 수 있었다.
하지만 과연 지금도 국민은 金정부의「개혁 정치」에 계속 갈채를 보내고 있는가.오히려 국민은 지금 개혁정치의 왜곡된 현실과방향에 대해 냉소적이고 부정적인 시선을 보내고 있지는 않은가.
연일 터지고 있는 살인과 강간,세도(稅盜)와 군 인 탈영등의 사건을 보면서 개혁정권의 국정관리 능력과 위기대처 방식에 불안감을 감추지 못하고 있지는 않은가.
여기서 문제는 이러한 사건들을 그동안 우리 사회에「누적된 병폐들」의 어쩔 수 없는 폭발 현상으로 보고 있는 당국의 상황 인식에 있다.
바로 이같은 상황 인식 때문에 문제 해결의 근본 대책도 모색하지 못하고,국정운영의 난맥상에 대한 책임소재도 가려내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국가의 치안과 안보 문제가 이번처럼 적나라하게 제기된 적이 없었는데도 내무장관.국방장관에 게 책임을 묻지 않은 것은 자체의 개혁을 두려워한 「개혁정권」의 잘못된 상황 인식의 증거는 아닌가.걱정스런 것은 이러한 정부의 처사가개혁정치에 대한 국민의 불신을 증폭시키지 않을까 하는 점이다.
그러나 보다 심각한 문제는 이러한 눈앞의 사건들이 제기하는 정치적 파장이다.
개혁정권의 통치능력에 대한 불신에서 과거시대에 향수를 느끼는복고주의적 정치 조류가 새로이 형성되고 있다는 것이다.여기에는권위주의의 망령과 냉전의 긴장이 다시 떠오른다.이러한 정치적 흐름은 연일 일어나는 충격적 사건의 터널에 출 구(出口)가 보이지 않을 뿐 아니라 舊질서의 붕괴 후에 나타나야 할 신한국(新韓國)의 새로운 모습이 보이지 않기 때문에 발생하는 것이다.
개혁정치에 의한 반동적 정치의 극복이 시급하다.
그러나 개혁정치의 거창한 구호에도 불구하고 정치권 내부는 변화의 시대에 걸맞은 정책 대안(代案)의 제시는 고사하고 원초적이해관계에 의해 갈기갈기 찢겨 있는 듯한 상황이다.
여당인 민자당(民自黨)은 좌(左)에서 우(右)까지 오월동주(吳越同舟)의 불안한 균형 상태에서 소외와 무력감을 한탄하고 있고,제1야당인 민주당(民主黨)은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정당으로서의 독자적인 행동반경마저 확보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또제3의 대안세력이어야할 신민당(新民黨)은 집안 싸움으로 국민의분노를 불러일으키고 있다.
이러한 기성 정치권의 난맥상 속에서 수구적(守舊的)정치 조류들이 제 모습을 드러내려 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하지만 구시대의 막이 이제 내려가고 개혁정치의 새로운 막이 오르기도 전에 무대 뒤에서 과거의 정치적 조류 들이 고개를들기 시작한다면 그것은 심각한 정치적 역행(逆行)이 아닐 수 없다.무대 장치가 바뀌지도 않은채 이대로 막이 올라가면 한국정치는 과거로 퇴보하고 말지 않겠는가.
여기에 개혁정치에 대한 본질적 논의를 국정관리 능력과 더불어본격적으로 시작하지 않으면 안되는 이유가 있다.
***新韓國비전 제시해야 정치의 무엇을 변화시키고 무엇을 보존해야할 것인가를 하루 빨리 논의하지 않으면 안된다.아니,정치를 포함한 신한국의 미래상을 국민앞에 하루빨리 분명히 제시하지않으면 안되는 것이다.그렇지 않고는 PK라인이니 KK라인이니 하는 원시적 정치조직과 권력운용으로 무대 뒤에서 꿈틀거리고 있는 구시대의 정치적 흐름들을 극복할 수는 없는 것이다.
내년이면 해방 50년.바로 지금이 세계의 변화와 더불어 시작된 해체와 건설의 신한국 행로(行路)에 차질없는 선택을 해야 할 시점이다.
〈서울大교수.정치학〉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