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석영, 3년 반 해외생활 청산 귀국 후 ‘첫 말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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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2면

소설가 황석영(64)씨가 해외 생활을 청산하고 돌아왔다. 2004년 4월 19일 영국으로 출국했다 지난달 29일 귀국했으니 3년 6개월만의 귀환이다. 그는 영국 런던에서 약 2년, 프랑스 파리에서 약 1년 반을 머물렀다.

 황씨의 완전 귀국은 일종의 ‘사건’에 가깝다. 그는 2004년 출국 직전 “한국과 거리를 두기 위해 떠난다”고 말했다. 본의 아니게 자꾸 정치적 상황과 얽히곤 했던 ‘한국적 특수성’에서 멀찌감치 떨어져 있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애초의 계획은 올 초 소위 ‘중도 총대론’ 발언으로 어긋나고 말았다. 서울에서 열리는 문학행사 참석차 잠깐 귀국했던 그는 “올 대선에서 중도 세력이 힘을 모아야 하며 이를 위해 총대를 멜 수 있다”고 선언했다. 이 발언은 손학규 전 경기도지사를 공개 지지한 것으로 해석됐으며, 마침내 그는 자신이 손 전 지사의 한나라당 탈당을 권유했다는 일화마저 공개했다.

 황씨는 원래 이달 말께 입국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이달 국내에서 열리는 문학행사에 줄줄이 초청되면서 귀국 일정을 한 달 가까이 앞당겼다. 귀국 인터뷰는 그래서 늦어졌다. 여러 매체에서 인터뷰를 신청했지만 그는 매번 거절했다. “급하게 들어오는 바람에 아직 생각을 정리하지 못했다”는 게 이유였다. 그는 이제야 정리된 생각을, 본지에 맨 먼저 털어놨다.

 Q.유럽에서 뭘 보고 왔나.

 A.“변모된 세계를 자세히 들여다보고 왔다. 세계가 어떤 생각으로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직접 보고 체험했다.”

 Q.좀더 구체적으로 말해달라.

 A.“유럽은 지금 우경화의 길을 걷고 있다. 서구 유럽엔 아프리카·아시아뿐 아니라 동구에서도 이주 노동자들이 쏟아져 들어오고 있다. 그들로 인해 비정규직 노동자가 급격히 불어났고, 서구 사회는 고용 불안과 청년실업 문제로 골머리를 앓고 있다. 프랑스에서 보수 진영의 사르코지가 대통령이 되고, 영국 노동당이 침체에 있는 상황 모두 이러한 맥락에서 파악해야 한다. 지금 유럽은 혼란스런 이행기에 있다.”

 Q.성과가 있었다면.

 A.“현지 작가들, 유럽 유수의 출판사 관계자들과 폭넓은 교류를 할 수 있었다. 활동 영역을 국제적으로 넓혔다고 할 수 있다.”(※2004년부터 유럽에 번역됐거나 계약을 마친 그의 작품은 열 편이 넘는다. 중요한 건 독일의 데테파우, 프랑스의 쥘마 같은 굴지의 출판사들이 그의 작품을 출간했다는 데 있다. 『오래된 정원』 『손님』 『심청』 『한씨연대기』 등이 호평을 받았는데 특히 『오래된 정원』은 2005년 프랑스에서 ‘올해의 책 5권’에 선정되기도 했다.)

 황씨의 완전 귀국은 문학적으로도 의미가 있다. 그는 한국문단이 공인하는 ‘떠돌이 이야기꾼’이다. 단편 ‘삼포 가는 길’은 스무 살 언저리의 황씨가 무작정 전국을 유랑했던 일을 토대로 쓰여졌으며, 장편 『무기의 그늘』은 작가의 베트남전쟁 참전 경험에서 비롯됐다. 무엇보다 그에겐 남들과 다른 북한 체험이 있다. 89년 방북했고, 이후 여러 나라를 떠돌며 망명 생활을 했다. 그 오랜 방랑의 세월을 비로소 마감한 것이다.

 Q.런던과 파리, 두 도시 중에서 어디가 좋던가.

 A.“런던은 실무적인 도시다. 별로 재미가 없었다. 한국에 대한 이해도 파리보다 훨씬 떨어졌다. 런던엔 한국문화원도 없더라. 그래서 문화원을 열어보려고 나름대로 힘을 썼는데, 잘 안 됐다. 그러나 프랑스는 달랐다. 한국 문화에 대한 호기심과 관심이 상당했다. 내가 유럽에서 번 인세가 5만 유로(약 5000만원)쯤 된다. 한국에선 내세울 만한 액수가 못 되지만 유럽에서 한국작가가 이만큼 팔렸다는 건 의의가 있다고 생각한다.”

 Q.껄끄럽겠지만 정치 얘기를 묻지 않을 수 없다. 대선 정국을 어떻게 바라보나.

 A.“새로운 변수(이회창 후보의 출마)가 등장해서 아직은 잘 모르겠다. 대신 흥미로운 걸 발견했다. 이제 대선이 겨우 한 달 남았는데, 술집이고 식당이고 심지어 문인들까지도 선거 얘기하는 걸 못 봤다. 여태 이렇게 잠잠한 대선은 처음 봤다.”

 Q.왜 그런 거 같은가.

 A.“글쎄, 출마한 면면이 죄다 마음에 안 들어서 그런가?”

 Q.외국에 있어도 대선 캠프에서 연락이 갔을 텐데.

 A.“어디 어디에서 왔는지는 못 밝히겠고, 대부분의 대선 캠프에서 연락이 왔었다고만 하자. 물론 다 거절했다. 내가 정치인은 아니잖은가.”

 Q.손학규 전 지사의 요청도 거절했나.

 A.“올 봄에 (손 지사가) 탈당하고나서 내가 이렇게 말했다. ‘살아서 돌아와라. 그러면 도와주마’. 한데 살아서 돌아오지 못했다.”

 Q.선생은 손 지사의 탈당을 권유했다. 지금 손 지사에게 한마디 한다면.

 A.“여러 가지로 고생이 많았다. 도와주고 싶었지만 당내 경선까지 내가 개입할 수는 없었다. 심정적으로 응원할 수밖에 없었다. 한 발짝 물러서서 다음을 바라봐야 하지 않겠나. 개인적으로 유감이다.”

 Q.손 지사가 중도 탈락했으니 이젠 정동영 후보를 지지하는가.

 A.“정동영 후보는 당내 경선을 거쳐 대선 후보가 된 사람이다. 정통성이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내가 지금 당장 도와줄 형편은 못 된다. 민노당을 포함한 범여권 후보들의 대통합이 이뤄진 뒤라면 고려해 보겠다. 그 정도는 돼야 리더의 자격이 있다고 생각한다. 정치 얘기는 그만하자.”

 Q.하나만 더 묻자. 차기 대통령이 갖춰야 할 덕목이 있다면.

 A.“세계 정세를 타고 넘어갈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 급변하는 세계 경제에 적절히 대응하는 정책을 펼 수 있어야 한다.”

 Q.미국을 잘 알아야 한다는 얘긴가.

 A.“미국과 북한은 조만간 수교를 할 것이다. 그러면 우리도 북한과 수교를 해야 한다. 북미 수교에 이은, 남북 수교. 그게 올바른 방향이다. 남북 교류는 비즈니스의 차원이 되어야 한다. 정치적인 논리로 남북 문제에 접근하던 때는 지났다. 이젠 정말로 정치 얘기 그만하자.”

 Q.알았다. 그럼 정치 얘기만큼 싫어하는 노벨상 얘기를 하자.

 A.“유럽에 있으면서 한국문학이 해외에서 아직은 생소하다는 걸 절감했다. 더 많은 문화 교류와 번역 작업이 필요하다. 작년에 터키의 오르한 파무크가 받아 버려서 당분간 아시아에서 노벨 문학상 수상자가 나오긴 어려울 것 같다.”

 Q.번역 얘기가 나왔으니까 말인데 신작 『바리데기』의 문체가 예의 그 황석영의 문체와 많이 다르다. 간결하고 빠르다. 번역을 염두에 둔 시도란 지적이 있다.

 A.“이번에 내 문체가 달라진 건 맞다. 그러나 번역을 염두에 둔 게 아니라 독자를 염두에 둔 변화다. 간결한 진행과 빠른 전개는 젊은 독자의 기호에 내가 맞춘 것이다. 작가가 독자를 좇아가야지, 안 그런가?”(※올 7월 출간된 장편 『바리데기』는 현재 25만 부 가량 팔렸다. 출판사에 따르면 독자 대부분이 20∼30대다.)

 Q.그럼 앞으로도 이 문체를 유지하나.

 A.“아니다. 내년 초쯤 ‘강남형성사’를 쓸 작정인데, 그 소설은 또 전혀 다른 형식이 될 것이다. 등장인물 각자가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방식을 구상하고 있다.”

 Q.참, 완전 귀국하면 지방에 내려가서 살 거라고 했었는데.

 A.“올 여름에 지방 몇 군데를 돌아보고 왔다. 전북 진안이 마음에 들던데, 거기에 뿌리를 내릴 건지 집필실만 둘 건지 아직 결정을 못 내렸다.”

 인터뷰는 13일 오후 서울 인사동의 한 카페에서 진행됐다. 거기에서 작가는 와인 리스트를 펼쳐들고 직접 와인을 골랐다. 이 와인은 어떻고 저 와인은 어떻고, 즉석 와인 강의가 이뤄졌다. 프랑스 와인을 품평하는 황석영의 모습에서 4년 전과 달라진 면모를 읽었다면 실례일까. 황석영이 돌아왔다. 여전히 그는 젊었다.



황석영

 1943년 만주 장춘 출생. 평양에 살다가 48년 가족과 함께 월남했다. 경복고 재학 중이던 62년 ‘사상계’ 신인상을 받으며 등단했다. 20대 초반 출가를 감행하는 등 유랑생활을 하다 베트남 전쟁에 참전했다. 70년대 이후 민주화 운동에 헌신, 74년 자유실천문인협의회(현 민족문학작가회의) 결성을 주도했다. 구로공단에 위장 취업하는 등 노동운동에도 관여했으며 그때 손학규 전 경기도 지사와 연을 맺었다. 80년대 초반엔 김지하 시인 등과 함께 마당극 운동도 벌였다. 89년 방북을 감행, 독일·미국 등지에서 5년간 망명 생활을 하다 93년 귀국했다. 귀국 즉시 구속돼 감옥에서 5년을 살았다. 좌중을 압도하는 특유의 입담 덕에 두 개의 별명을 거느린다. 김일성 주석이 붙여준 게 ‘민족의 재간둥이’고 한국문단에선 흔히 ‘황구라’로 통한다. 한국문학사에서 진보적 리얼리즘을 대표하는 작가로, 고은 시인과 함께 한국 최초의 노벨 문학상 수상 후보로 거론된다. 대표작으로 『장길산』 『무기의 그늘』 『한씨연대기』 『오래된 정원』 『손님』 『바리데기』 등이 있다.

글=손민호, 사진=변선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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