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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릴린치-씨티 소송전 금감원이 싸움 붙였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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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1면

미국 뉴욕에서 메릴린치가 씨티그룹을 상대로 소송을 준비 중이다. 문제는 금융감독원의 지나친 금융시장 간섭이 소송의 빌미가 됐다는 점이다.

메릴린치는 한국에 진출한 자사 계열의 페닌슐라캐피탈(이하 페닌슐라)에 대해 한국씨티은행이 일방적으로 계약을 취소해 피해를 보았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에 대해 씨티그룹은 “한국씨티은행은 금융감독당국의 규제에 따라 어쩔 수 없이 계약을 파기했다”며 “우리에겐 책임이 없다”고 맞서고 있다. 국내 금융규제가 해외에서 법적 분쟁의 불씨가 된 것은 처음이다. 메릴린치가 소송을 제기하면 금감원도 계약 파기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을 전망이다.

 13일 금융업계에 따르면 미국 메릴린치가 지분 79%를 보유한 페닌슐라는 지난해 7월 한국씨티은행과 신탁계약을 맺었다. 페닌슐라가 담보로 잡은 부동산을 한국씨티은행이 신탁관리하는 대신 수수료를 챙기는 조건이었다. 페닌슐라는 이 계약을 근거로 일종의 자산유동화증권(ABS)을 발행해 싼값에 돈을 조달하려는 의도였다. 이런 신탁계약은 국내에는 생소하지만 미국에선 대부분의 주택담보대출 업체들이 이용하는 방식이다. 페닌슐라는 이 계약을 바탕으로 공격적인 영업에 나서 단숨에 국내 대부업 시장 1위로 올라섰다. 6개월 만에 주택담보대출 5336억원을 끌어모은 것이다.

 그러나 정부가 부동산 가격을 잡기 위해 주택담보대출을 조이면서 문제가 발생했다. 시중은행의 대출 문턱이 높아지고 주택담보대출 수요가 대부업체로 쏠리자 금감원이 나선 것이다. 금감원은 대부업체에 대한 감독 권한이 없다. 이 때문에 금감원은 지난해 연말 감독 대상인 한국씨티은행에 페닌슐라와의 신탁계약을 중단하도록 압박한 것으로 알려졌다. 시중은행을 통해 대부업체의 주택담보대출을 간접 규제한 셈이다. 금감원은 5월에는 우리투자증권도 페닌슐라와 신탁업무 계약을 한 것을 알고 한 달 만에 계약 파기를 유도했다. 우리투자증권 관계자는 “문제의 신탁계약은 위험이 낮고 수수료는 높아 꼭 유지하고 싶었다”며 “하지만 금감원의 심기를 살피지 않을 수 없었다”고 말했다.

 금감원 고위 관계자는 “공식적으로 한국씨티은행이나 다른 금융회사들에 페닌슐라와의 계약을 파기하라고 요구한 적은 없다”며 “부동산시장이 식어가는 상황에서 금융회사들이 리스크 관리 차원에서 스스로 판단한 것”이라고 일단 외압설을 부인했다. 그러나 또 다른 금감원 관계자는 “주택담보대출과 대부업 문제가 지난해부터 줄곧 사회적인 이슈로 부각해 금감원으로선 부담이 컸다”며 “시중은행에 영향력을 행사해서라도 간접 규제에 나설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안혜리·함종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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