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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국제걷기대회에서 만난 사람, 사람들 ② - 한류에 빠진 일본인들

중앙일보

입력

한풀 기세가 꺾였다고는 하지만 한류는 역시 무서웠다. 걷기대회와 한류가 무슨 상관인가 싶겠지만, 대회에 참가한 일본의 어린이들부터 40~50대의 장년층까지 각별한 한국 사랑을 감추지 않았다. 어린이들은 한국에서 온 ‘언니’, ‘오빠’들이 좋다며 사인을 요청하기도 했고, 40~50대 주부들은 손수 한국어로 수를 놓은 작품들을 가방에 붙여 행렬을 이루었다. 카와타 시게루(64세) 씨는 특히 유창한 한국어 실력을 자랑했는데, 나나와 루카(13세) 두 어린이와 야미코(54세)와 인터뷰를 하는 데 통역을 맡아 주었다.

■나나, 루카(13세) - “칸코꾸~ 칸코꾸~! 사인해 주세요!”
자매인 니나와 루카 두 소년들은 그저 평범한 한국인들에게도 사인을 요청하며 환하게 달려들었다. 소년들은 사흘간의 일정에 하루도 빠진 적 없이 20km씩 꼬박꼬박 걸었는데, 걷기에 대한 열정만큼이나 한국에 대한 사랑도 뜨거웠다. 이유인즉 ‘한국의 언니들이 예쁘다’는 것. 그들은 한류 열풍의 대표주자인 가수 보아의 노래와 한국 드라마를 들뜬 목소리로 언급했다. 아니나 다를까, 소년들이 한국을 알게 되고 좋아하기 시작한 데에는 ‘욘사마’ 배용준이 있었다. 엄마가 욘사마를 매우 좋아한 탓에 “마음도 좋고 외모도 근사한 한국 사람들”이라는 인식을 자연스럽게 갖게 된 것이다.
나나와 루카는 대회에 참가해 한국 사람들을 만나고 그들과 우정을 나누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무척 만족스러운 듯했다. 소년들을 만나는 한국 사람들에게 손수 접은 학을 나누어 주었다. 소년들과 마찬가지로 기자 역시 오랫동안 잊지 못할 듯하다.

■이나가키 유키(54세) - 이병헌과 남산 타워를?
단연코 눈에 띌 수밖에 한 중년 여성이 있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한국말을 배우고 있습니다. 천천히 말해주세요”라는 문구를 한 땀 한 땀 바느질해 배낭 앞에 붙이고 너무나 흐뭇한 듯 웃어 보이는 이나가키 유키 씨. 속으로 지레 짐작하기를 ‘배용준의 팬이거나 혹은 이병헌의 팬이거나…?’ 했는데 역시나 딱 맞아들었다. 그녀는 주저 않고 이병헌의 이름을 또박또박 발음했다. 한국어를 배운지는 4~5년 정도 되었고, 상대가 천천히 말하기만 하면 그 뜻은 거의 알아듣는 수준에 이르렀다.
이나가키 유키 씨는 한국에도 여러 차례 다녀왔다고 말한다. 좀 더 정확히 얘기하자면 ‘시간이 날 때마다’ 가족이나 친구들과 한국 여행에 나선다. 물론 한국의 드라마와 문화, 그리고 한국 사람들의 일상생활을 자주 접하기 위한 관광 차원의 여행이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유키 씨는 지난 4월 체육진흥회와 일본의 워킹협회가 공동으로 주최한 ‘조선통신사 옛길 한일우정 걷기대회’에 참가했다. 한국과 일본 두 나라의 참가자들이 서울에서 도쿄까지 조선통신사들의 이동경로를 따라 걸으며 양국 간의 역사에 대해서 다시금 되돌아 볼 수 있는 좋은 기회였고, 덕분에 한국에 대한 마음이 더욱 깊어졌다는 게 유키 씨의 이야기다.
유키 씨는 아침저녁으로 매일 5km씩 걷기 운동을 꾸준히 하고 있으며 걷기대회에도 몇 년 째 빠지지 않고 참석하는 자타공인 부끄럽지 않은 ‘워크홀릭’. 그녀는 한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길로 남산 타워 오르는 길을 꼽았다. 아마도 한번 쯤 이병헌과 멋진 남산 데이트를 꿈꾸어 보았을 성 싶기도 하다.

■카와타 시게루(64세)- 오빠상이 사는 법
대회에 참가한 한국인들에게 열렬한 응원을 보내는 일본인들과 무리 없이 이야기를 나누고 그들과 함께 흥분할 수 있었던 것은 카와타 시게루 씨의 멋진 통역 솜씨 때문이었다. 재미있게도 그의 한국 이름은 ‘오빠’. 사람들이 부르기 쉬우라고 직접 지었다고 했다. 그의 작명 의도가 적중했는지 대회 기간 동안 ‘오빠상’의 주가는 내내 상종가였다.
일본 무사시노 은행의 지점장을 지낸 카와타 시게루 씨는 매우 성실한 워크홀릭인데, 그의 만보기가 그것을 증명해준다. 항상 만보기를 착용하고 다니는 카와다 시게루 씨는 최근 몇 년 사이 만보기를 리셋하지 않고 늘 켜두는데, 기자와 인터뷰한 날을 기준으로 날짜로 치면 1986일, 거리로는 22,417km에 이른다. 하루 평균 11km를 걸은 셈이다.
카와타 시게루 씨는 이런 ‘걷기 사랑’을 ‘한국사랑’으로 고스란히 치환했다. 그는 1995년 이후부터 일본걷기협회에서 주최하는 크고 작은 행사에 빠짐없이 참석해 ‘자매결연’을 맺었다는 얘기를 들을 정도로 걷기에 열심인데, 원주에서 열린 걷기대회에 참가한 것을 계기로 한국에 푹 빠지게 됐다. 몇 년 전에는 한․일 수교 4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두 달 동안 한국 일주 걷기에 나서기도 했다. 제주도를 시작으로 부산에서 동해안을 따라 강원도까지 올라갔다가 다시 서울에서 충청도와 전라도 일대까지 내려오는 대장정이었다. 아무나 나설 수 있는 여정은 아니다.
아무나 할 수 없는 여정에 당당히 성공한 카와타 시게루 씨에게도 당연히 ‘워크홀릭’의 철학이 있다. 하지만 유별나고 독특한 철학이 아니다. 걷기 좋아하는 사람들이 늘 말하듯 그는 걷기가 경쟁하는 운동이 아니며 세상과 동떨어진 운동도 아니라는 것을 강조했다.
“누가 빨리 걷느냐, 누가 이겼느냐 하는 것은 아무 의미도 없죠. 또 혼자서 하는 운동도 결코 아닙니다. 많이 걷고 많이 생각하고 많이 대화할 수 있게 하는 운동이 바로 걷기죠.”

객원기자 정유진 yjin78@join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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