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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속도로위의 가수 4대 천왕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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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란영= “제 노래 듣고 장애인도 춤췄어요. 목소리 나올 때까지 노래할 겁니다. 전국의 팬들 모두 모아놓고 라이브 콘서트 하는 게 꿈이에요”

김용임= “내 노래 들으면 답답함이 풀린데요. ‘김사모’도 생겼어요. 메들리 가수도 노래 잘하면 뜰 수 있죠”

진성= “삶의 무게 견디지 못해 긴긴세월 방황 속에 청춘 묻었지만 이제 노래로 빛 볼 날 기다려요”

신웅= “메들리 연예기획사 세워서 후배들 양성할 겁니다”

단풍이 한창이다. 울긋불긋 단풍과 가장 잘 어울릴 꽃노래는 무엇일까? 고속도로 휴게소로 나가보자. 제일 먼저 들리는 게 “쿵짝 쿵짝” 신나는 뽕짝이다. 고속도로 ‘길보드’ 차트에서는 메들리 뽕짝음악이 절대강자다. 이 시장에서 ‘4대천왕’으로 불리는 이들이 있다. 김란영ㆍ김용임ㆍ진성ㆍ신웅.
얼굴은 알려져 있지 않지만 트럭 운전기사들 사이에서 이들을 모르면 간첩. 고속도로에서만큼은 조용필이나 주현미보다 더 대접받는다. 극심한 불황 속에서도 이들이 내놓은 메들리 뽕짝 음반은 1000만 장 이상씩 팔려나갔다. 무대는 마이너급에 언더그라운드이지만 실력만큼은 메이저다. 중앙SUNDAY가 이름보다 목소리가 더 알려진 4대천왕을 만나 음악과 인생, 꿈에 대해 들어봤다.

‘카페의 여왕’ 김란영

“저더러 카페의 여왕이래요, 호호호.”
서울 강서구 염창동 자택에서 만난 가수 김란영(46)씨. 그의 별칭은 음반이름 ‘카페 노래’ 시리즈에서 따왔다. 카페 시리즈는 지금까지 60집이 나왔다. 음반 판매량은 3000만 장으로 ‘여왕’ 칭호가 과하지 않다. 카페 시리즈가 히트를 치자 ‘카페 무대’ ‘밤의 카페’ 등의 짝퉁이 잇따르면서 메들리가 한때 호황을 누렸을 정도다.
그런데도 그는 얼굴 없는 가수로 알려져 있다. 초기의 음반에 사진을 싣지 않아서다. 항간엔 ‘노래는 잘해도 워낙 얼굴이 못생겨서’란 소문까지 돌았다. 물론 헛소문이었음이 인터뷰로 확인됐다.

“신비주의 컨셉트는 아니고 그냥 아무 생각 없이 얼굴을 넣지 않았어요. 나중엔 ‘팬들의 꿈을 깨지 말자’고 생각해 그냥 (사진 없이) 갔었죠. (음반을 들어보이며) 이제는 표지에 제 얼굴을 이렇게 크게 넣고 있어요.”

김란영이란 이름도, 얼굴도 모르다가 차 안에서 테이프나 CD를 듣다가 목소리에 사로잡힌 팬이 많다. “남편 자동차에 탔다가 즉석에서 제 팬이 됐다는 주부들이 많더라구요.” 그의 음색은 맑으면서도 한이 서려 있다.

“김용임씨는 밝고 파워 있지만 저는 좀 슬픈 느낌이고요. 운전하시는 분들이 많이 들으니 편안한 컨셉트로 노래를 불러요.”

그는 고3 때인 1976년 KBS 신인가요제에 입상하면서 가수의 길을 걸었다. 그해 전남 여수에서 서울 M여고로 전학 와 오아시스레코드와 전속계약을 했다. 연예계 입문이 30년이 넘은 것이다.

“서울에 막 오니까 김연자ㆍ바니걸스 이런 분들이 자리잡고 있고, 괜히 무섭더라구요. 딱 느낌이 오는 게 ‘노래만 잘해서는 절대 아니구나’라는 거였어요.”

처음엔 통기타 가수로 활동했다. 김세화ㆍ어니언스ㆍ김정호ㆍ홍민 등을 길러낸, 1980년대 한국 포크음악의 산실 명동의 라이브카페 ‘쉘부르’가 그의 무대였다. 그러다 88년 리메이크로 메들리 음반을 내게 됐다.

“아주 우연히, 정식 녹음도 아니고 가녹음을 해서 음반사에 갖다 줬더니 연락이 와서 계약을 하게 됐죠.”

그것이 대히트를 친 카페 시리즈다. 3000만 장이 팔렸지만 계약금 외에 보너스 한 푼 못 받았다.

“얼떨결에 시작한 것이 나중엔 장르로 자리 잡히더군요. 이게 좀 되니까 기성 가수들도 리메이크를 하더라구요. 나훈아씨도 냈지요? 안 팔려서 반품되긴 했지만…(웃음).”
리메이크 가수로 성공했지만 자기 노래에 대한 애착이 강하다. 그는 지난해 ‘미시의 외출’ ‘안부’ 신곡 음반을 1억원을 들여서 냈다. “음반이 잘 나가느냐”는 물음이 떨어지기 무섭게 “안 나가죠”라고 대답한다.

“PR을 많이 해야 하는데 (돈이 들어) 못 하니까. 그런데도 왜 일을 저질렀냐면 히트 못 시켜 빚지는 한이 있어도 김란영이 노래 하나쯤은 갖고 싶었던 거죠. 왜 전세 살기 싫고 산동네라도 내 아파트 갖고 싶은 거 있잖아요.”

연예활동을 하면서 무엇이 가장 힘든지 물었다. “데뷔 후 외부에서 ‘화류계다’ 이렇게 보는 것이었죠. 그땐 중매를 서도 3순위도 아니고, 한 7~8순위? 유혹도 많긴 많더라구요. 상처받지 않으려 마음을 닫아두다 보니 사람을 못 사귀었어요. 난 ‘젊고 괜찮고 노래도 잘하니까 끝까지 내 힘으로 일어서야지’ 했죠. 간혹 남자를 만나도 늘 자기방어를 먼저 생각했고….”

아직 미혼인 그에게 결혼 계획을 물었다.

“옛날엔 남자보다 노래가 먼저였죠. 30살이 넘어가니 만날 수 있는 사람이 줄어들더군요. 40살 넘어선 전부 재취자리였고…(웃음) ‘네가 참 힘들구나’ 하고 배려해 줄 수 있는 사람이면 돼요.”

그의 꿈을 들어봤다.

“아마추어랑 저랑 노래했을 때 ‘역시 프로군요’ 하는 소리를 듣는 것. 목소리가 나올 때까지 노래하겠습니다.”

‘소박’한 꿈 하나를 덧붙인다.

“이 나이에 제가 비나 조용필이 될 건 아니니까…. 엊그제 라이브 무대에서 제 노래를 듣고 장애인이 덩실덩실 춤을 추는 걸 봤어요. 아, 음악은 장애도 극복하도록 하는구나 생각했죠. 김란영 노래 들으면 행복해진다, 그런 소리를 듣는 가수가 되고 싶어요. 언젠가 전국에 있는 김란영 팬들을 모아놓고 라이브 한번 해야죠.”

‘트로트의 여왕’ 김용임

“교도소에 위문공연을 자주 가는데, 그때마다 ‘제 노래를 부를까요 말까요’ 하고 양해부터 구해요.”

서울 서대문구 창전동의 음악실에서 만난 가수 김용임(42)씨. 얘기가 조금 생뚱맞다. 노래를 불러주러 가서 노래해도 되는지 허락을 받다니. 이유가 있다. 그의 히트곡은 가사가
‘밧줄로 꽁꽁, 밧줄로 꽁꽁, 단단히 묶어라’로 시작한다. 노래 제목은 ‘사랑의 밧줄’. “노랫말만 들으면 교도소 계신 분들이 꺼림칙할 수 있잖아요.” 그는 “다행히 다들 열렬히 환호해 주시곤 한다”며 활짝 웃었다. 그는 선행가수다. 교도소로, 양로원으로 활발하
게 봉사활동을 다녀 2005년엔 문화관광부 장관이 주는 선행상을 받았다.

그는 고속도로 4대천왕 가운데 가장 나이가 어리다. 그렇지만 연예계 데뷔는 가장 빠르다. 여섯 살 때인 1971년도에 무대에 섰다.

“노래 부르는 사람들은 다 ‘끼’가 있나 봐요. 당시엔 하춘화쇼, 나훈아쇼 같은 극장쇼가 유명했어요. 노래 잘하는 베이비 가수들을 모아서 하는 극장쇼도 있었구요. 저도 ‘꼬마 천재 베이비 가수’ 타이틀로 나가곤 했죠. 호호.”

아역배우 경험도 있다. 초등학교 시절 ‘아빠하고 나하고’라는 영화에서 주인공의 친구 역을 맡았다고 한다. 학업 때문에 고등학교 때까지는 활동을 중단했다. 졸업 후 음반을 내면서 정식으로 연예계에 데뷔했다. 84년 서울예전(현 서울예대) 무용과에 진학한 뒤 86년 ‘학생가수 김지운’이란 이름으로 음반을 다섯 개나 냈다.

순탄할 듯한 연예생활은 이후부터 긴 정체기였다.

“제가 노력을 안 한 부분도 있고, 매니지먼트를 잘 못해 뒷심도 부족했고…. 가수의 길이라는 게 보통 험한 게 아니에요. 가수란, 이름도 나고 박수도 받고 인기를 먹고 살아야 하는데, 방송에는 잘 출연하지 못하고 만날 밤무대만 서는 게 비참하기도 했고….”

그는 90년 초 결혼과 함께 가수활동을 접었다. 컴백한 게 90년대 후반. 다른 가수의 노래를 리메이크해 메들리로 불렀다. 복귀는 성공적이었다. “제 창법은 시원시원하고 화통하대요. 답답함이 풀린다나요?”

무용과 출신의 그가 경쾌한 율동까지 곁들여 노래를 부르면 공연장도 들썩인다. 덕분에 지금은 하루에 5개씩 스케줄이 잡힌다. 음반이 1000만 개 이상 팔렸으면 돈도 많이 벌었을 법하지만 그 또한 ‘무명의 설움’을 겪었다.

“무명가수들은 판만 내주면 고마워하죠. 저도 상상할 수 없이 낮은 액수에 음반을 계약했죠. 나중에 음반이 아무리 많이 팔려도 판권이나 인세는 전혀 못 받죠.”

하지만 부수효과는 컸다. 트로트 메들리가 성공하면서 ‘사랑의 밧줄’ 같은 본인 노래도 인기를 얻었다. 요즘엔 ‘내사랑 그대여’ 신곡이 인기다.

“얼마 전 낸 트로트 매들리 음반에는 다른 가수의 노래가 아니라 제 신곡(내사랑 그대여)을 첫 머리에 올려놨어요. 지방공연을 가느라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밥을 먹는데 가는 곳마다 내 사랑 그대여가 나오는 거예요. 다른 가수들이 ‘네 노래만 나온다’고 부러워도 하고 시기도 하고….”

방송 출연 요청도 잦아졌다. ‘김용임을 사랑하는 모임’이란 팬클럽도 만들어졌다. ‘김사모’들은 그를 ‘여왕님’이라고 부른다.

“트로트 사회에서 메들리 가수는 보통 밑으로 봤거든요. 방송에 안 나오는 가수들이니까요. 이젠 판도가 바뀌는 것 같아요. 노래만 잘 부르면 메들리 가수들도 뜰 수 있죠. 주현미랑 문희옥도 처음엔 트로트 메들리 가수였거든요.”
10년의 공백기와 10년의 무명시절이 이제 희망으로 바뀌고 있는 중이다.

‘태클 걸지마’의 진성

‘어떻게 살았냐고 묻지를 마라. 이리저리 살았을 거라 착각도 마라. 한때 삶의 무게 견디지 못해 긴긴 세월 방황 속에 청춘을 묻었다…’. 가수 진성(44)씨의 신곡 ‘태클 걸지마’의 가사 중 일부다. 노랫말이 꼭 자신의 얘기다.

“어렸을 때 불우했지요. 부모님하고 떨어져 10대부터 유랑극단을 따라다녔어요.” 10대 후반에 무작정 상경해 밤 업소밖에 갈 곳이 없었다.

“그때 서울엔 강남의 신사 캬바레, 종로 국일관ㆍ우미관, 열댓 개가 유명했지요.”
고생은 말도 못했다. “무명에 3류 가수이다 보니 업소에 기생하던 어깨들에게 급여도 떼이고…. 밴드가 족발 안 사준다고 손님들 앞에서 노래하는데 갑자기 반음을 올려버리고, 말도 못했습니다.”

하지만 그곳에서 인생의 전기를 맞는다. 업소에 놀러온 작사가 김병걸씨(가요 ‘찬찬찬’의 작사가)의 눈에 띄었다고 한다. “그분이 테이블로 오라고 해서 갔더니 ‘목소리가 듣기 좋은데, 메들리 해보겠느냐’고 하더군요. 흥분되는 일이었죠.” 그런데 처음 나온 음반이 하나도 팔리지 않았다. “약간 못하는 듯해도 깊이 있게 표현하는 게 중요한데 그걸 모르고 잘 부르려고만 했어요. 지금은 저 세상에 있는 문승아란 가수가 ‘너는 노래의 ‘길’을 모른다’면서 선생을 붙여 레슨을 시켜줬지요. 그 다음부터 나온 음반은 날개를 달았죠.”

그렇게 시작한 연예인 생활이 15년을 훌쩍 넘겼다. 그는 스스로의 노래를 어떻게 평하고 있을까. “메들리하고 제 목소리가 맞는다고 할까. 창법이 나훈아씨랑 비슷해요. 미성이죠. 나훈아씨는 저음을 좋게 내는데 저는 고음에서 생김새와는 달리 깨끗하고 맑은 음색이 나옵니다.”

그는 요즘 또 한번 인생의 전기를 맞으려고 한다. ‘태클 걸지마’가 KBS 시트콤 ‘못 말리는 결혼’의 배경음악이 된 것. 탤런트 김수미씨가 ‘태클 걸지마’의 가사를 흥얼흥얼대는 장면이 나온다.

‘태클 걸지마’는 아버님 산소 앞에서 만든 노래라고 한다.
“고향(전북 부안) 쪽으로 지방공연을 갔다가 아버님 산소에 들러 막걸리 한 잔 올리고 먼 산을 바라보다 아이템이 떠올랐어요. 그런데 저처럼 무작정 서울로 올라온 40대 후반 세대 중에 공감하는 분이 많은가 봐요. 이게 잘되면 저도 인생이 역전될 수도 있는 거죠.”

은퇴 준비하는 맏형 신웅

“제 음반이요? 셀 수도 없죠. 한 1000만 장 이상 나갔을까요?”
가수 신웅(55)씨는 자기 음반이 얼마나 나갔는지 정확한 수치를 모른다. 그만큼 그의 노래는 언더에서, 길보드에서 인기를 끌었다. 원래 자기 노래를 부르던 가수였으나 1995년 ‘안방 메들리’로 밀리언 셀러를 기록하면서 방향을 바꿨다. 지금까지 음반을 40장 정도 냈는데, 못 나간 게 70만~80만장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정작 돈은 제작자들이 다 벌었다고 말한다.
“메들리는 실력이 없으면 할 수 없어요. 수십 명의 다른 가수 노래를 소화해야 하니까요. 내 노래는 들으신 분들이 싫증이 안 난대요.”
그는 4대천왕 가운데 가장 연배가 높다. 요즘은 마지막 신곡을 준비 중이라고 한다. 은퇴를 생각하고 있다는 얘기다.그렇다고 연예계를 아주 떠나는 건 아니다. 엔터테인먼트 회사를 차리려고 한다.
“이제 노래는 할 만큼 했고, 후배 가수들을 위해 저도 뭔가 준비를 해야지요. 저도 방송계통에 대해선 많이 아니까요.”
4대천왕 중 가장 먼저 무대에서 내려올 신웅씨. 인터넷에는 그에 대해 ‘대한민국에서 가장 노래를 잘하는데 왜 일류가수가 안 되는지 알 수가 없어요’ 등의 아쉬움이 담긴 글이 많다. 조만간 고속도로의 전설로 남게 될 듯하다.

강민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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