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설

국민을 절망케 하는 국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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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이제 국회는 우리에게 절망감을 안겨주고 있다.

국회는 9일 한.칠레 자유무역협정(FTA) 비준을 다시 무산시켰다. 한국 국회의 통과만 기다리던 칠레에는 물론 국제적으로도 이만저만 망신이 아니다. 게다가 국회의 논의 내용을 보면 FTA 부결 가능성까지 보여 역사상 최초로 시도한 FTA가 물 건너가는 최악의 상황도 배제할 수 없게 됐다.

총선에서의 표만을 의식한 이 같은 의원들의 단견으로 앞으로 우리 경제엔 적지 않은 그늘이 드리워질 전망이다. 이미 칠레에서의 한국산 자동차.휴대전화 등의 시장점유율이 떨어진 것은 물론이고 중남미 시장 전체에서 따돌림을 당하게 됐으니 이런 국회를 보면서 할 말을 찾기가 힘들다. 대외 의존도가 70%에 이르는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외톨이가 되면 그 결과는 뻔하다. 나라는 어찌되든 국회의원에 당선만 되면 그만이란 말인가. 누구를, 무엇을 위한 금배지인가.

정부와 합의해도 국회에서 안 되는 나라를 상대로 어떤 국가가 협정을 맺으려 하겠는가. FTA가 한국 경제의 생존에 꼭 필요한 것인 줄 뻔히 알면서도 의원들은 농민단체를 설득하기는커녕 눈치 보느라 반년을 허송세월한 것도 모자라 실력행사를 거쳐 결국 이날의 사태까지 왔다.

국회와 의원.정당들은 이런 결과를 초래한 데 대해 강한 비판을 받아 마땅하다. 과연 이들이 국익을 생각하고 국민을 대변하는 사람들인지 심각한 의문을 갖지 않을 수 없다.

그동안 정부나 노무현 대통령이 보인 태도도 안이했다는 지적을 면키 어렵다. 진작에 보다 적극적으로 정부 정책을 설명하고 협조를 당부했더라면 이런 어처구니없는 결과가 빚어졌을까. 이러고도 입만 열면 민생과 경제를 챙기겠다고 하는가.

명색이 여당이라는 열린우리당이 같은 날 이라크 추가 파병안의 국회 통과를 연기하겠다고 결정함에 따라 파병안 처리 역시 불발됐다.

이와 관련, 우선 책임이 있는 열린우리당은 비난을 받아 마땅하다. 미국이 추가 파병을 요청한 것이 5개월 전이다. 정부가 파병 원칙을 정한 것은 지난해 10월이고, 盧대통령이 주재하는 안보관계 장관 회의에서 최종 결론을 내린 것이 12월 17일이다. 도대체 그동안 무엇을 하고 있다가 본회의 처리 당일에야 정부안이 당론과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연기를 결정하는가.

열린우리당의 정체성이나 구성원의 면면들을 볼 때 파병이 내키지 않을 수 있다. 하지만 그렇다면 미리 盧대통령이나 정부와 협의해 자신들의 주장을 정부안에 반영했어야 했다. 정부안이 결정되고 여기에 야당이 동조토록 한 뒤 이의를 제기하는 것은 얄팍한 술수라고밖에 달리 표현할 말이 없다. 야당은 함정에 빠뜨린 뒤 자신들은 반미.자주를 내세워 지지표를 챙기자는 계산을 한 것은 아닌가.

특히 경찰이 막고 있는 파병 반대론자들을 집안으로 불러들인 뒤 국회에 전화로 "집 밖으로 나갈 수 없는 상황"이라고 한 열린우리당 소속 장영달 국회 국방위원장의 처신에는 기가 막힐 따름이다.

비록 이날 표결하겠다고 했지만 '권고적 당론'이란 형식으로 반대키로 한 민주당도 무책임하고, 원내 과반수를 차지하면서도 눈치 보기로 일관하며 정체성을 잃어버린 한나라당 역시 한심하다.

미국과 우리는 동맹관계다. 동맹은 동맹의 몫을 해야 한다. 또 큰 틀에서 우리가 어느 나라와 손을 잡고 가야 국익이 될지 자명한 것 아닌가. 이런 행태를 보며 미국은 한국을 과연 고마워나 할까. 이미 파병을 한 일본 자위대와도 비교될 게 분명하다.

이 같은 국회와 정당을 국민이 더 이상 좌시해서는 안 된다. 나라보다 당을 먼저 생각하는 정당들과 국익보다 개인의 이익을 먼저 챙기는 의원들이 버티고 있는 한 우리나라의 장래는 암담하다. 의회를 설득하기는커녕 혼란을 방관.조장하는 정부도 마찬가지다. 국민은 냉정히 따져 이번 총선에서 그 책임을 준엄하게 물어야 한다.

이와 함께 대통령과 각 당 지도부는 이 같은 상황이 벌어진 데 대해 국민 앞에 사죄해야 한다. 이러고도 지도자이고, 이러고도 정치인인가. 대통령과 각 당은 의원들을 설득하고, 안 되면 공천 배제 등의 비상한 수단을 동원해서라도 남은 임시국회 회기 내에 반드시 FTA 비준안과 파병 동의안을 통과시키고 국가적 혼란을 바로잡아야 한다. 그것만이 정치권이 국민과 역사 앞에 더 이상 죄를 짓지 않는 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