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여인의 시민정신 맹목살인 확대 막았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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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상상하기 조차 끔찍한 범죄의 적발에는 절망을 뛰어넘은 한 여인의 기지와「시민정신」이 있었다.범인 검거에 결정적 단서를 제공한 李모양(27)의 경찰진술을 토대로 제보에서 검거까지의 상황을 재구성해 본다.
◇피랍=역삼동의 술집종업원인 李양은 8일새벽 같은 술집에서 악사로 일하는 이종원씨(36)의 그랜저승용차를 타고경기도 양수리 가도에서 드라이브를 즐기던중 강동은등 범인들이 갑자기 르망승용차와 포터화물차로 앞뒤를 가로막고 차안에 가스 총을 쏘는 바람에 기절했다.
李양이 희미하게 의식을 차렸을때 차는 새벽바람을 가르며 호남고속도로를 달리고 있었고 시골길을 구비구비 돌아 전남영광군 범인들의 아지트에 도착했다.
범인들은 李양을 집단으로 욕보인뒤 1층 차고에 위장된 철판을들어내고 李씨와 함께 지하실로 끌고가 자신들이 만든 사제 감옥에 감금했다.
◇살인=잠시뒤 지하실로 내려온 범인들은 李씨를 신문하기 시작했다. 공포로 하룻밤을 꼬박 새운뒤 다음날인 9일 범인들은 소주병을 들고 지하실로 내려왔고 두명 모두를 없애버리기로 작정한듯 했다.
李양이 『살려달라』고 애원하자 범인들은 낄낄거리며 『그럼 네가 우리일을 도와라』고 했다.
범인들은 李씨의 입에 강제로 소주를 들이부은뒤 李씨가 취하자비닐봉지를 李씨목에 뒤집에 씌웠다.
『어서 이놈 목을 잡아.』 李양은 눈물 범벅이 된채 부들거리는 李씨의 목 뒷부분을 붙잡았고 범인들이 비닐봉지를 조르자 李씨는 허우적 거리다 이내 축 늘어졌다.
◇구명=다음은 자기차례라는 느낌이 든 李양은 결사적으로 『시키는대로 할테니 살려달라』고 애원했고 범인중 김현양이 李양이 맘에 든듯 『천천히 죽이자』고 제안했다.
13일밤 李양은 초주검 된 蘇씨부부가 아지트로 끌려오는걸 보고 가슴이 덜컥했다.蘇씨부부를 지하감옥에 감금한 범인들은 蘇씨의 회사에 연락해 8천만원을 받아냈고 15일 새벽 蘇씨부부를「처형」하기 위해 지하실로 내려갔다.『너도 따라와.』범 인들은 李양을 강제로 지하실로 끌고가더니 술에취한 蘇씨에게 공기총을 겨눴다.『야 저X이 아무래도 의심스러우니 저X에게 총을 쏘게해.』 범인중 한명의 말에따라 갑자기 李양 손에 총이 건네졌다.
『안쏘면 너도 여기서 죽여버려.』 어차피 蘇씨는 죽을 목숨이었지만 李양은 하늘이 노랬다.울부짖는 李양에게 범인들은 낄낄거리며 『그럼 너도 죽을래』하며 다가섰고 李양은 눈을 감은채 엉겁결에 방아쇠를 당겼다.
◇탈출=15일오전 다이너마이트 투척연습을 하다 부상한 김현양이 병원을 가게되자 李양은 『내가 간호를 하겠다』며 자진해 나섰다. 李양은 金이 치료를 받는 사이 화장실에 가는척 하며 사력을 다해 병원을 뛰쳐나와 인근 마을에 있는 과수원으로 뛰어들었다.『아무말 묻지 마시고 절좀 살려주세요.』 과수원 주인은 李양이 딱해 보였던지 숨겨줬고 택시까지 대절해줬다.李양은 날이저물길 기다려 15만원을 주고 대전으로 올라온뒤 다시 택시를 타고 상경,친구 오빠를 만나 자초지종을 전하고 경찰에 신고해 줄것을 부탁했다.『거의 초주검 돼 있더군요.만일 李양이 신고를안했으면 백화점에서 고액거래자 명단까지 입수했던 범인들이 도대체 무슨일을 했을지 생각만해도 끔찍합니다.』 李양의 신고를 접수했던 서초경찰서 형사들의 말이다.
그러나 李양이 겪은 그 끔직한 고통들은 도대체 어떻게 치유될수 있을까.
〈金鍾潤.權赫柱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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