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키스탄 판 '10월 유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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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르베즈 무샤라프 대통령이 3일 국가비상사태를 선포하면서 파키스탄 정국이 혼란 속으로 빠져들고 있다. 헌법 효력이 정지되고 야권 주요 인사와 대법원 판사 일부를 포함한 1600명 이상의 반정부 인사가 체포된 것으로 알려졌다고 DPA 통신이 보도했다. 내년 1월로 예정된 총선도 연기될 것으로 보인다. 무샤라프와 베나지르 부토 전 총리와의 권력 분점 합의도 무산될 가능성이 커졌다.

◆대부분 헌법기관 활동 중단=샤우카트 아지즈 파키스탄 총리는 4일 기자회견에서 "선거 일정에 다소 변경이 있을 수 있다. 비상사태 하에서는 최대 1년까지 선거가 연기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그러나 "아직 최종 결정은 하지 않았다"고 덧붙였다. 무샤라프가 총선 일정을 연기할 경우 부토 전 총리와의 권력 분점 합의도 무산될 확률이 높다. 지난달의 합의는 내년 초 총선을 전제로 이뤄진 것이기 때문이다.

이에 앞서 비상사태 선포로 대법원을 포함한 모든 헌법기관의 활동이 중단됐다. 파키스탄 대법원에는 장갑차 등으로 무장한 군 병력과 경찰이 배치됐다. 원내에 있던 이프티카르 초더리 대법원장이 쫓겨나고 압둘 하미드 도가르가 새로운 대법원장에 임명됐다. 초더리 대법원장은 무샤라프 정권에 반대해 온 대표적인 민주인사로 지난 3월 해임됐다가 대법원 판결로 복직됐다. 대부분의 언론사에도 병력이 배치돼 모든 뉴스에 대한 검열이 이뤄지고 있다. 전국의 주요 전화망도 대부분 두절됐다.

◆대법원 판결 차단 목적=비상사태를 선언한 표면적 이유는 테러로 인한 국가 위협이다. 3일 국영TV를 통해 발표된 임시헌법령(PCO)은 "이슬람 극단주의자와 테러리스트들의 공격이 극에 달하고 있다. 일부 판사들은 극단주의에 맞서는 행정부와 입법부의 활동에 반하는 행위를 통해 정부 입지를 약화시켰으며 국가가 위협받고 있다"는 내용이다.

그러나 야권은 6일로 예정된 무샤라프의 대선 후보 자격에 대한 대법원 판결을 원천 봉쇄하기 위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야권은 이에 앞서 군 참모총장 직을 겸임하고 있는 무샤라프가 후보 자격이 없다며 대법원에 헌법소원을 냈었다. 무샤라프는 지난달 대선에서 90%가 넘는 압도적 지지로 당선됐지만 파키스탄 선거법에 공직자는 대선에 입후보하지 못하도록 규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야권과 국민 반발=대법원은 비상사태 선포가 헌법에 어긋나는 것이라며 무효 결정을 내렸다. 그러나 이번 사태로 대법원의 활동이 중단돼 효력을 보지 못하고 있다. 두바이에 머물고 있던 야권 지도자인 부토 전 총리도 소식을 듣고 급거 귀국했다. 그는 3일 영국 스카이뉴스 TV와의 인터뷰에서 "내년 초로 예정된 총선을 1~2년 연장하기 위한 술수로 보인다"말했다.

무샤라프의 정적으로 사우디아라비아에 망명 중인 나와즈 샤리프 전 총리는 3일 인도 CNN-IBN과의 인터뷰에서 "우리는 무정부 상태로 향하고 있다"고 말했다. 국민들의 반발도 크다. AP통신은 "파키스탄 국민 대부분이 이번 비상사태 선언을 지지하지 않고 있어 미얀마 사태와 같은 대규모 민주화 시위가 일어날 가능성이 크다"고 분석했다.

홍콩=최형규 특파원

◆무샤라프 대선 출마 자격 파동=파키스탄 선거법은 공직에 재직 중이거나 퇴임한 지 2년이 넘지 않은 사람은 대통령 입후보 자격이 없다고 규정하고 있다. 따라서 육군참모총장 직을 겸하고 있는 무샤라프 대통령의 대선 출마는 원천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게 야당의 주장이다. 그러나 무샤라프는 대법원이 9월 28일 이런 내용의 헌법 청원을 기각하고, 선관위가 예외 조항을 만들면서 후보 자격을 얻었다. 그러면서 대통령에 당선하면 참모총장직을 사임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럼에도 야권은 무샤라프의 출마 자체가 불법이라며 대법원에 재차 헌법 청원을 제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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