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태평양 작은 나라 통가의 ‘외교 의전’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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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호 08면

외교관들의 출장이라고 하면 컨벤션 센터나 근사한 호텔을 떠올리게 마련이다. 사고 현장 수습 등의 긴급상황을 제외하면 외교관의 출장 동선에는 어느 정도 수준의 의전이 따라다닌다. 우리 외교관들이 해외로 나가건, 외국의 사절들이 우리나라에 오건 마찬가지다. 하지만 주최국 사정에 따라선 ‘민박’을 해야 하는 경우도 발생한다. 지난 10월 17~19일 남태평양의 작은 왕국 통가에서 열린 태평양도서국포럼(PIF) 행사에서 그런 일이 있었다. 외교부의 문태영 대사(외교안보연구원 아태연구부장)와 박두순 서기관(남아시아대양주 지역협력과), 정상천 서기관(주 뉴질랜드 대사관) 등 3명은 외교관 생활을 시작한 뒤 처음으로 해외에서의 홈스테이(homestay)를 하게 됐다. 그들이 지낸 방은 곰인형으로 가득한 집주인의 7살짜리 아들 방이었다.

외교관 3명, 호텔방 없어 가정집 아이 방서 홈스테이

PIF는 호주· 뉴질랜드· 피지 등 남태평양 16개 도서국가 정상들이 모여 지구 온난화에 따른 해수면 상승 등 당면 현안을 논의하는 회의체다. 해수면 상승으로 땅 전체가 사라질 위기에 처해 관심을 모으고 있는 투발루도 여기에 속한다. PIF는 한국과 일본·미국·중국·프랑스 등 14개 대화 상대국(PFD)도 초청, 이 지역에 대한 관심과 지원을 이끌어낸다. 모두 30개국 대표단 150여 명이 통가에 모였다. 748㎢ 면적에 인구 15만 명, 외교부 직원 수 10명, 방위 병력 450여 명의 소국 통가 입장에선 버거운 규모다. 수도인 누쿠알로파섬의 유일한 호텔(인터내셔널 데이트라인)은 16개국 정상과 수행원들의 숙소로 일찌감치 동이 났다. 섬 안의 민간인 차량 150대도 참석자들을 위해 동원됐다. 우리 대표단을 지원한 연락관은 뉴질랜드에서 관광차 통가에 온 컴퓨터 프로그래머였다. 대화상대국에서 온 대부분의 외교관들은 통가 정부가 알선하는 대로 홈스테이를 해야 했는데, 우리 대표단은 살로테 필로레부 푸이타 공주(조지 투포우 5세 국왕의 여동생)의 소개로 전 상공부 장관의 집에서 묵게 됐다.

박두순 서기관은 “세 사람은 집주인 아들의 잠자는 방과 놀이방 등에 나뉘어 잠을 잤다”면서 “작은 방에 놓인 야외용 대형 선풍기, 모기와 밤새 전쟁하며 잠을 설친 게 기억에 남는다”고 말했다.

집주인 부부는 손님들을 위해 항상 차를 끓여주며 정성을 다해 따뜻하게 대해줬다고 한다. 우리 대표단은 그 부부의 아이를 귀여워해 주는 것으로 감사를 표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숙박이 공짜는 아니었다. 1인당 1박에 70달러씩을 지급했다. 일본 대표단도 민가에 머물렀다. 더 비싼 100달러를 냈다고 한다. 왕족의 집권이 900년 이상 지속되고 있는 통가는 문자 해득률 99%, 감리교·모르몬교가 다수를 지배하는 보수적인 사회다. 하지만 1인당 국내총생산(GDP)은 2300달러로, 미국과 호주·뉴질랜드로 떠난 국민(전체의 반 정도)들의 송금에 의존하는 저개발국가다. 통가를 떠나는 날 새벽 비행기를 타기 위해 집을 나선 우리 대표단 일행은 불도 안 켜진 공항 의자에서 잠을 자고 화장실에서 세수를 한 뒤 경유지인 뉴질랜드로 향했다. 문태영 대사는 “외교관 생활 30년 만에 처음 경험한 홈스테이였지만 향수도 느낄 수 있었던, 인상 깊은 출장이었다”고 말했다. 내년 PIF 회의(39차)는 통가보다 더 작은, 인구 1492명(CIA자료)의 니우에섬(뉴질랜드령·263㎢)에서 열린다. 회의 참가 외교관 대부분이 홈스테이를 하며 소박한 남태평양의 의전을 경험할 수도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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