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리안 드림’을 꿈꾸는 이들의 손을 잡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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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호 10면

1. 우즈베키스탄 부하라국립대학에서 한국어를 가르치는 우은정씨(맨 오른쪽).

우즈베키스탄에 전해 내려오는 우화 한 토막. 어느 날 남루한 차림의 한 남자가 현자(賢者) 나스레딘 호자를 찾아와 억울함을 호소했다. “한 음식점을 지나는데 맛있는 냄새가 났습니다. 음식을 사 먹을 돈이 없어서 문 앞에서 냄새만 맡았습니다. 그런데 주인이 나오더니 음식을 즐겼으니 돈을 내라는 것이었습니다. 제발 도와주십시오.”
나스레딘은 그 남자와 함께 법정에 갔다.

박상주가 만난 사람-우즈베키스탄에서 한국어 가르치는 우은정씨

재판관이 말했다. “그대는 이 사람의 음식 냄새로 배를 채웠으니 돈을 지불하라.” 나스레딘이 일어나서 음식점 주인에게 말했다. “선생님, 너무 화내지 마십시오. 이 가난한 사람은 제 동생입니다. 제가 대신 지불하지요.” 나스레딘은 자신이 가지고 온 동전 자루를 꺼내 짤랑짤랑 흔들었다. 나스레딘이 음식점 주인에게 물었다. “동전 소리를 들으셨습니까?” 부자 음식점 주인은 “물론 들었소”라고 대답했다.

2. 당나귀를 타고 손을 흔들며 익살스러운 표정을 지은 나스레딘 호자의 동상. 우즈베키스탄에 전해 내려오는 우화 속 현자(賢者)다. 3. 실크로드의 유적을 간직한 부하라 시내에는 아름다운 고적이 많이 남아 있다. 4. 부하라의 한 골목길, 화려한 문양의 가방과 공예품을 파는 노점상 여인.

나스레딘 왈, “그럼 됐습니다. 내 동생은 당신의 음식 냄새를 맡았고, 당신은 그의 돈 소리를 들었습니다. 이제 빚을 갚았습니다.” 나스레딘은 가난한 자의 팔을 붙잡고 유유히 법정을 빠져 나왔다.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는 휴머니스트
지난 9월 24일 실크로드의 한 거점이었던 우즈베키스탄 부하라 한복판의 ‘라비 하우즈’(타지키스탄어로 ‘작은 연못’이라는 뜻). 추석 전날이어서 하늘엔 보름달이 휘영청 걸려 있었다. 작은 연못가에는 당나귀를 탄 채 손을 흔드는 익살스러운 표정을 한 인물 동상이 서 있었다.

우리나라의 ‘봉이 김선달’ 혹은 ‘김삿갓’ 격인 나스레딘 호자였다. 13세기 튀르크 제국 시절의 인물로 실재 여부는 확실치 않지만 지금까지 중앙아시아와 터키 등지에서 민중의 사랑을 듬뿍 받는 해학과 풍자의 주인공이다.

나스레딘처럼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고, 남의 어려움엔 발 벗고 나서는 휴머니스트들이 우리 주변엔 더러 있다. 부하라국립대학에서 한국어를 가르치는 한국국제협력단(KOICA)의 우은정(37)씨 역시 이런 부류의 사람이었다. 나스레딘 동상 바로 앞에 위치한 연못가 음식점에서 은정씨를 만났다. 러시아식 꼬치구이인 샤슬릭을 안주 삼아 맥주를 마시면서 이야기를 나눴다.

말 안 통하는 외국인 노동자를 위하여
한 사람의 인생 항로를 결정짓는 것은 자신의 의지일까, 아니면 흔히 말하는 팔자일까. 1990년대 중반, 은정씨는 한때 몸담았던 이른바 운동권에서 외국인 노동자를 돕는 일을 했다. 10년여 세월이 흐른 지금 그는 한국에 3D업종 인력을 송출하는 국가들 중 하나인 우즈베키스탄에서 한국어를 가르치고 있다.

“요즘 우즈베키스탄 사람들은 ‘코리안 드림’을 꾸고 있습니다. 한국에 가서 5~6년 일하고 오면 부자가 될 수 있기 때문이지요. 몇 년 전부터 한국어 바람이 불기 시작한 이유입니다.”

언어는 소통이다. 말과 글을 통한 소통이 안 될 때 손해를 보는 것은 늘 약자다. 은정씨는 한국어를 하지 못하는 외국인 노동자들이 억울한 피해를 당하는 것을 보고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고 했다.

“1995년 시민운동단체인 노동정책연구소에서 일을 했습니다. 산업연수생 출신의 외국인 근로자들에 대한 차별이 심각한 사회문제로 대두되던 때였어요. 한번은 공장에서 일을 하다가 손가락이 잘린 외국인 노동자 한 사람이 연구소를 찾아왔습니다. 피가 흐르는 손가락을 움켜쥔 채 도움을 호소하더군요. 서투른 한국말 때문에 사장에게 항의 한번 제대로 못했던 것입니다. 그런 딱한 처지의 외국인 노동자들이 한둘이 아니었지요. 이후 2년여 동안 임금체불 고통을 겪고 있는 이들을 위해 고소장을 작성해 주거나, 지방노동위원회를 함께 찾아가는 등 외국인 근로자들을 돕는 일을 했습니다.”

저널리스트를 꿈꾼 활동가
한때 그는 저널리스트를 꿈꿨다. 불평등과 불의로 가득 찬 세상에 글을 통해 항변하고자 했던 것이다. 대학 시절 학보사 기자 생활에 이어 졸업 후 한동안 민중일보 기자로 활동했다. 그러나 신문사가 1년 만에 문을 닫는 바람에 뜻을 접어야 했다. 2005년 6월 미얀마 여행을 갔다가 KOICA 봉사활동을 하고 있는 친구를 만났다. 친구가 봉사하는 모습을 보니 한동안 잠자고 있던 ‘휴머니스트 본능’이 깨어났다. 결국 은정씨는 지난해 10월 KOICA 봉사단원으로 부하라에 오게 된다.

은정씨가 맡고 있는 한국어 교실 학생은 모두 120여 명이다. 오전엔 재학생 35명을 대상으로 한 정규수업, 오후엔 지역 주민 90여 명을 위한 특별수업을 하고 있다.
“우즈베키스탄의 문맹률은 ‘제로’에 가깝습니다. 우리나라 못지않게 대단한 교육열이지요. 대상(隊商) 무역을 했던 이곳 사람들의 특징인지는 몰라도 언어 습득 능력도 아주 탁월합니다. 게다가 우리말을 배우는 이곳 사람들은 한국에 가서 돈을 벌어오겠다는 일념 때문에 더욱 열성적으로 공부를 합니다.”

봉사가 아니라 연민이다
이날 오후 은정씨와 함께 부하라 시내를 거니는 동안 여러 사람들이 그에게 다가와 반갑게 인사를 했다.

“그동안 한국어 교실을 통해 배출한 제자들이 꽤 됩니다. 부하라는 손바닥만 한 작은 도시이기 때문에 오다가다 자주 만납니다.”

부하라는 실크로드 유적을 간직한 예쁜 도시였지만 그 속에서의 삶은 고달픈 듯했다.
“이곳 물은 끓이면 허연 기름 덩어리가 둥둥 뜹니다. 바닥엔 석회가루가 쫙 가라앉습니다. 국자로 기름 덩어리 걷어내고, 석회가루 일어나지 않게 살짝 따라서 마십니다. 생수를 사서 마시려면 너무 비싸요. 이곳에선 세탁기도 사치품입니다. 손빨래를 하고 있지요. 이젠 습관이 돼서 할 만합니다.”

이런 고생을 하고 있는 은정씨지만 그는 자신이 무슨 대단한 봉사활동을 하고 있다는 생각을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다고 했다. 그저 힘들고 딱한 사람들을 볼 때마다 ‘내가 저들에게 해줄 수 있는 일이 뭘까’ 하고 작은 고민을 했을 뿐이라고 했다. 저토록 작은 체구 속에 어떻게 저런 큰 마음이 들어 있을까.


박상주씨는 18년 동안 신문기자로 일하며 다양한 분야의 사람을 만나 얘기 나누는 걸 즐긴 언론인으로 지금은 세계를 방랑 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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