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에디터칼럼

불쌍한 '을' 이어도 좋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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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물건 파는 사람의 임무는 질 좋은 제품을 싸게 시장에 내놓는 것이다. 그것이 그들의 이익 극대화에 부합하기 때문이다. 파는 쪽은 많이 팔아 좋고, 사는 쪽은 싸게 살 수 있어 좋다. 누이 좋고 매부 좋은 일이다. 두말하면 잔소리인 이 논리를 놓고 말이 많다. 이마트의 자체상표(PL·Private Label) 확대 전략이 논란의 발단이다.

PL은 제조업체가 만들어 납품한 물건에 소매업체가 자신의 브랜드를 붙여 파는 걸 말한다. 이마트는 보름 전 3000여 종의 PL을 진열대에 올려놓았다. 할인점의 자체 브랜드 제품은 전에도 있었지만 품질이 좀 처진다는 인상을 줘왔다. 이마트는 그동안 쌓은 신뢰를 바탕으로 이번에 품질에 자신있는 물건을 기존 제품보다 20∼40%나 싸게 출시했다.

2년간 공들여 추진해온 이 전략에 소비자들은 바로 반응했다. 그 유명한 코카콜라가 이마트 콜라에 당했다. CJ의 히트상품 햇반도 이마트의 ‘왕후의 밥’에 1등 자리를 넘겨줬다. 물론 이마트 내 판매 실적이다. 이런 시도에는 ‘한국, 너무 비싸다’는 본지의 기획 시리즈도 큰 영향을 줬다고 한다. 소매업체가 물건 값을 낮추기 위해 애쓰는 건 당연히 칭찬받을 일이다.

PL이 새로운 상술 같지만 따지고 보면 오래됐다. ‘주문자 상표 부착 생산(OEM·Original Equipment Manufacturing)’이라는 게 있다. 아주 보편화돼 있는 생산 방식 중 하나다. 중소업체들이 주문자(주로 대기업)가 원하는 제품을 납품하면, 주문자는 거기에 자신의 상표를 붙여 파는 것이다. PL은 OEM과 같은 이치다. 납품받는 업체가 대기업에서 대형 소매점으로 바뀐 정도다. 둘 다 주문 또는 하청 생산이다.

OEM과 다르지 않은 PL이 논란이 되는 건 무엇 때문인가. 납품하는 기업이 불쌍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들에게 대형 마트의 요구는 거역할 수 없는 명령이다. 가격을 후려쳐도 울며 겨자 먹기로 수용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 납품업자들의 볼멘소리다. 할인점이 ‘갑’이고 납품업체는 ‘을’인 것이다.

갑을의 관계는 자본주의 세상 어디서나 비슷하다. 제약회사 영업맨들이 병원과 의사들을 ‘특별관리’하는 일은 미국에서도 널리 알려진 비밀이다. 자기 회사 약을 팔기 위해 의사들의 선물을 챙기고, 고급 휴양지에서 세미나를 후원하는 일 정도는 다반사라는 얘기다. 세상은 아주 오래전부터 그렇게 돌아가고 있다.

지금은 유통이 제조업을 지배하는 시대다. 기자들이 애써 취재한 뉴스 콘텐트를 유통입네 하는 포털들이 세상에 뿌리면서 생색 내는 게 요즘의 미디어 시장이다. 천하의 삼성전자도 베스트바이와 같은 미국 전자제품 소매 체인에 연방 허리를 굽혀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진열대의 좋은 자리를 차지할 수 없기 때문이다. 삼성이 가격을 올릴 경우에도 그들의 눈치를 봐야 한다. 베스트바이가 자신들의 매출이 줄어든다며 싫어하기 때문이다.

갑과의 관계에서 을은 불쌍하다. 그러나 을이 되지 못해 안달하는 업체들에게 을은 선망의 대상일 뿐이다. 대형 할인점에 자사 제품을 들이밀기 위해 줄지어 서 있는 기업이 얼마나 많은가.

이마트의 PL 확대 발표 직후 권오승 공정거래위원장은 견제구를 날렸다. “물건을 싸게 팔면 소비자들은 좋지만 부담이 제조업체로 전가될 수 있다”는 지적이었다. 납품업체를 괴롭히면 재미없다는 일종의 경고였다. 그러나 시장엔 불쌍한 을이 돼도 좋다는 기업이 넘쳐난다. 권 위원장은 하나만 알고 둘은 몰랐다. 모든 경쟁은 아픔이고, 그런 고통 속에서 가격 혁명은 전진한다는 것을.

한국 기업 중에서도 유통업체들은 별나다. 세계 최대 할인점 체인인 미국의 월마트나 프랑스의 까르푸가 이 땅에 발붙이는 데 실패했다. 그만큼 국내 업체의 경쟁력이 뛰어나다는 얘기다. 그들이 주도한 가격 파괴는 이미 큰 흐름이 됐다. 이번 PL은 또 하나의 혁명이다. 자신의 경쟁력을 높이고 수많은 소비자에게 혜택을 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시장의 이런 도도한 흐름은 공무원들의 낡은 생각을 비웃을 뿐이다.

심상복 경제부문 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