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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명의원류를찾아서>1.잉카수도 쿠스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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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9면

물질문명과 이데올로기가 힘을 겨뤘던 한시대가 서서히 물러가고이제 인류의 정신적 가치를 소중히 여기는 또 한시대가 열리고 있다.지나간 역사 속에서 인류가 그려온 족적을 되돌아보는 작업은 인류가 서 있는 현재와 다가오는 미래를 풍요 롭게 하는 밑바탕이 된다.南美의 잉카,北美의 마야문명 발상지,인도문명의 어머니인 갠지스강 유역,태초의 문명을 잉태한 중동,중국문명의 젖줄인 揚子江 등을 따라나서는 문명탐험 시리즈를 법학자의 명쾌한분석력과 시인의 예리한 감각을 겸비 한 李相冕교수의 집필로 週1~2회 소개한다.사진 역시 李교수가 촬영한 것이다.李교수는 지난 수년동안 학문을 연구하는 틈틈이 문명의 발상지에 대한 빈틈없는 취재와 깊은 사색을 계속해왔다.
[편집자註] 우리처럼 어린아이의 궁둥이에 몽고반점이 있고,언어조차 우리와 같은 우랄 알타이語계라는 아메리카 인디오들.그들중에서도 특히 남미에서 문명의 꽃을 피운 잉카의 후예들은 북미의 마야인들에 비해 우리와 더욱 가까운 느낌이 드는 것은 무 엇 때문일까.
밤새 타고온 비행기가 새벽녘에 리마 공항에 도착했다.물건을 팔러온 인디오들이 펼쳐 보이는 밝은 색상의 무늬들이 잠이 덜 깬 나의 눈을 시원하게 했다.때묻지 않은 문명의 선율이 긴 여로에 지친 나의 핏줄을 울려주는듯 했다.3천4백m 고원에 있는쿠스코에 가기 하루전쯤 리마에서 쉬면서 고도 적응을 하는 것이좋다는 안내책자의 충고에도 불구하고 나는 쿠스코행을 고집했다.
만년설을 이고 있는 안데스 산맥의 설봉 아래 이따금씩 호수들이 보였다.
해발 3천8백m에 있는 티티카카 호수는 면적이 8천여평방㎞로백두산 천지의 1천 배에 이른다.이 거대한 호수의 중앙에 잉카의 시인 망코 카파트가 태양의 아들로 강림했다는 태양의 섬이 있다.그는 인근에 있는 달의 섬에 내려온 여자를 아내로 맞은 다음 황금의 단장이 꽂히는 곳을 택하라는 현몽에 따라 쿠스코에도읍을 정했다고 했다.
쿠스코는 조그만 분지에 있는 아담한 도시였다.붉은 지붕의 스페인식 단층집들이 산비탈에 늘어서 있었다.시내 중심에 있는 아르마스 광장 주변에도 바로크식 대성당을 비롯,스페인식 건물들이도열해 있었다.잉카제국의 수도에 와 있으면서도 잉카 궁전의 잔영조차 볼 수 없다니,우두커니 서있는 나에게 인디오 안내인은 산타도밍고 교회에 있는 잉카 궁전의 잔재를 보여준다고 했다.
산타도밍고 교회는 스페인의 어느 조그만 도시에 있는 고풍스런교회같았지만 그 토대는 잉카시대의 것이 분명했다.거대한 돌들을빈틈없이 짜맞춘 모양은 흡사 로마에서 느낄 수 있는 굳건하고도웅장한 분위기를 자아냈다.교회 내부에도 잉카 시대의 것으로 보이는 벽이 몇개 남아 있었지만 잉카제국 궁전의 위용은 짐작해내기 어려웠다.
『이곳이 잉카제국의 「황금의 궁전」 코티칸차가 있던 곳입니다.벽의 한쪽 면이 황금으로 덮여 있었답니다.』 신대륙 발견에 이어 16세기초 스페인 침략자들이 파나마를 경영할 무렵 남미 중원을 거의 석권했던 잉카제국은 와이나 카팍 황제가 세상을 뜨자 장자와 서자 사이에 내란이 벌어지게 된다.서자인 아타활라가1532년 격전지에서 승리를 자 축하던 날 스페인 정복자 피차로는 신령스러운 책자(성경)를 바치러 왔다며 황제와의 접견을 요구,총칼을 휘둘러 황제를 체포하는 데 성공한다.피차로는 자기가 갇힌 방 크기 만큼의 황금을 주겠다는 황제의 요청을 받아들여 황제를 일시 석방 하지만 곧바로 내란죄를 적용,처형하고 만다.피차로는 황제의 이복 동생 망코를 내세워 원주민을 무마하려하였지만 얼마 안가 도망친 그는 20만 대군을 동원해 쿠스코를포위,왕성 탈환작전에 돌입한다.
수개월간 지속된 혈전에서 총포에 눌린 망코의 군대는 상당수 궤멸됐고 5천여명의 결사대가 시내 북서쪽 언덕에 있는 삭사이와만 요새에 들어가 항전하였으나 끝내 스페인 군대에 압도돼 전원이 몰살하고 만다.
스페인 진압군은 이 요새를 없애버리기로 했다.많은 돌들이 시내로 옮겨져 스페인인들의 집을 짓는 데 사용되었지만 수십t에서수백t에 이르는 돌들을 잉카 특유의 기술로 빈틈없이 쌓아올린 축대만은 어찌할 수 없었다.성벽이 세겹으로 되어 있 는 이 요새는 한 면이 4백여m씩이나 된다.말도 소도 없었고 수레조차 사용할 줄 몰랐던 그들이 어떻게 이 거대한 돌들을 운반,드높이쌓아올릴 수 있었을까.철제 연장을 사용할 줄 몰랐던 그들이 어떻게 칼로 자르듯 돌을 다듬어 쌓았을까.
요새 옆동산 위에는 하얀 구세주 그리스도 상이 두팔을 들어 쿠스코 시민들에게 구원의 손길을 뻗치고 있었다.무너진 성벽 사이를 돌아다니는 동안 석양은 붉은 지붕이 덮인 쿠스코를 한층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어린 인디오 소년이 민속의상 을 입고 라마(작은 낙타처럼 생긴 남미 특유의 양)를 치고 있었다.『그래,아버지를 아비지라고 했지?그러면 하늘은 뭐라고 하니?』나는 그 소년이 우리 민족의 친척인 것만 같아 날이 저문 것도 모르고 연신 캐묻고 있었다.
〈필자 소개〉 ▲1946년 충북청원 출생▲경기고 서울大법대卒.고등高試합격.외무부근무▲미국 하버드大 법학박사.미국 국무부 특별고문▲현 서울大법대 교수▲1989년『現代文學』지 통해 시인데뷔▲1992년「올해의 여행인 상」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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