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길을 걷습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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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래와 흙과 돌, 길이 될 수 있는 재료들은 보통 이런 종류의 것들이다. 헌데 그건 길에 대한 하나의 관습일지도 모른다. 물로도 길을 낼 수 있다. 홍해를 가른 성경 속 기적을 말하려는 게 아니다. 말 그대로 ‘물의 길’이다. 잠시라도 스쿠버 다이빙의 맛을 본이들이라면 단박에 알아차렸을 터이다.
수천마리의 물고기 떼가 화려한 은빛물결을 만들고 아름다운 어초와 조개들이 저마다의 다양한 색깔을 뽐내며 한 폭의 오묘한 그림을 그려내는 곳이 바로 저 푸른 바다다. 눈 밝고 마음 깊은 이들에게는 그저 황홀지경이랄 밖에 달리 이를 말이 없단다. 이 풍경을 오롯이 누리는 사람들, 물에 길을 내고 그 한복판을 걷는 사람들, 말하지 않아도 알겠지만, 그들이 바로 스킨스쿠버 다이버들이다.

깊은 바다 속 사람의 길
“물길은 자유로워요. 내 몸을 자유자재로 움직일 수도 있고 엄마 품속처럼 편안하죠.”
자칭 타칭 ‘바다의 왕자’로 20년 동안 스킨스쿠버를 해온 한국스킨스쿠버 연맹의 강경순 총재의 말이다. 스킨스쿠버는 skin diving(스킨 다이빙)과 scuba diving(스쿠버 다이빙)의 복합어다. skin diving(스킨 다이빙)은 수면에서 숨대롱(스노쿨), 오리발 등의 장비를 사용해 폐활량 한계 내에서 잠수하는 것을 뜻하고, scuba diving(스쿠버 다이빙)은 수중에서 호흡할 수 있는 장비를 지니고 수중에서 활동을 하는 다이빙을 뜻한다.
스쿠버 다이빙을 하는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하는 이야기가 있다. 물길에서 걷고 있노라면 육지로 나가고 싶지 않은 심정이 불쑥불쑥 솟구친다는 것. “다이버들은 신비로운 바다의 세계에 매료돼 다이빙을 그만 두지 못하죠. 다른 세상의 매력으로 가득 찬 곳이거든요.”
하지만 다이버들이 신비로운 바닷길에 취해 이곳저곳 방향 없이 떠도는 것은 아니다. 지상이 그러하듯 바다 속 역시 나름의 질서가 있으며 길이 있다. 다이버들이 인어의 열망을 품기는 하지만, 물고기의 세계를 흐트러뜨리지는 않는다. 가령 다이버들이 즐기는 길과 물고기들이 유영하는 길은 같지 않다.
다이버의 물길은 현지의 가이드들이 포인트로 지정해 놓은 곳을 따라 나있다. 포인트란 현지를 잘 아는 가이드가 직접 바다에 들어 가 길을 답사해 보고 다이버들이 안전하게 다이빙을 할 수 있는 곳을 말한다. 지상의 길에 전용도로가 있는 것과 유사하다. 현지 가이드가 포인트라고 지정 하지 않는 곳은 들어가서는 안 된다. 물길은 해류와 조류가 있고 수심의 높낮이가 다르기 때문에 물고기를 뒤쫓아 함부로 들어갔다 간 큰 화를 불러올 수 도 있다는 것이다.

깊은 바다 속 물고기의 길
다시 말해 사람의 길과 물고기의 길이 엄연히 따로 있다는 뜻이다.
물의흐름, 물의 온도, 플랑크톤의량, 등 다양한 요소들이 물고기들은 길을 만들어준다. 물고기들은 온도와 먹이, 그리고 조류에 따라서 이동을 한다. 수면 아래로 깊게 내려갈 수록 물의 온도는 낮아지고, 조류도 변화한다. 물고기들은 자신의 환경에 맞는 수심에서 길을 만들고 이동한다.
육안으로 볼 때는 확인하기 어렵지만 물고기는 ‘매우 예민한 동물’이다. 자신들의 고유한 물길에 미세한 변화라도 생기면 바다와 육지에 어떤 일이 생길지 꿰뚫을 수도 있다고 한다. 결코 과장이 아니다. 강경순 총재는 인도네시아에 발생했던 쓰나미를 예로 든다. 당시 물길에서 평소와 다름없이 노닐던 물고기 떼들의 움직임이 갑작스럽게 빨라졌고 어딘가로 숨어버려 보이지 않았다는 것이다. 갑작스런 지진의 발생으로 물길이 상하로 흔들렸기 때문에 위험을 감지할 수 있었던 것이다. 물론 그곳의 사람들은 아무도 그런 엄청난 지진이 일어날 줄 알지 못했다.
매우 당연한 이야기지만 깊고 푸른 바다, 그곳에서는 사람이 만들어 놓은 길과 질서가 무의미하다. 다만 자연의 길, 자연의 질서가 만개할 뿐이다. 그곳에서는 사람의 습관과 관행 그리고 사람의 속도까지도 모두 허용되지 않는다. 길 안내를 하는 것들은 물의 흐름과 물고기들. 스킨스쿠버를 하는 이들이 자꾸만 지상이 아니라 수면 아래로 들어가려는 이유가 바로 그들의 안내가 새로운 세계로 이끄는 손짓이기 때문이 아닐까?

객원기자 정유진 yjin@join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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