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속에서>性과 알몸연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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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무대위에서 여배우의 알몸연기가 문제되고 있다.영화.문학.연극에 있어 외설시비는 물론 영원한 미해결의 숙제같은 것이어서 한마디로 이렇다,저렇다 말할 수 없는 미묘하고 예민한 문제란 것은 새삼 말할 필요조차 없다.
그런데 문학이나 영화에서의 표현은 간접영향으로,한과정 거르는양식이기 때문에 배우가 관객의 시선앞에 실체로 나타나는 연극과는 다르다.
문제는 바로 거기에 있다.
나는 어릴때 거리에서 한 정신이상여인이 신체 주요 부위를 드러낸 채 배회하는 모습을 보고 수치스러워 눈을 감고 달아난 적이 있다.
왜 하필 정신이상과 이 문제를 비교하느냐고 할지 모른다.그리고 예술행위 운운할 것이 뻔하다.그런데 나는 요즘 이른바 10분간의 나체연기를 두고 흔히들 말하는 어떤 장소에서의「깜짝쇼」라고 하는 희한한 볼거리와 혼돈되는 자신을 어쩔 수 없다.이 말에 대해서는 많은 논란의 여지가 있음을 부인하지 않는다.
나는 性을 꼭 감춰두고 필요한 어느때 써먹어야 하는 필요악이라고는 물론 생각지 않는다.다만 우리 인간이 갖고 누리는 조건가운데 가장 한계를 가져야 하는 운명을 가진 것이 바로 性이 아닌가 하고 생각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性은 부정할 수 없이 우리 자신이며,우리 자신이 가꾸고 보호하고 격상시키지 않으면 파멸로 떨어질 수 있는 성질이있기 때문이다.
연극 『미란다』를 얘기하면서 웬 性타령이냐고 할지 모르겠다.
여성 신체 노출이란 결국 무엇인가.
그 어떤 미명아래서도 그것은 예술성의 극대화가 아니라 여성 신체 손상행위에 가까운 것이다.더구나 공개적인 장소에서의 노출은 예술을 빙자한 고도의 상행위 수단에 다름 아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것이 얼마나 위대한 명작이라고 10여차례 공연을 시도한단 말인가.관련자.관객 모두 곰곰이 생각해보면 너무도 잘 알 것이다.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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