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란 일던 무구정경, 통일신라 유물 가능성 높아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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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호 03면

41년 만에 판독된 ‘묵서지편’ 110쪽 중 하나. 박물관이 홈페이지에 공개했다.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현존 세계 최고(最古)의 목판인쇄물 중 하나로 꼽히는 무구정광대다라니경(無垢淨光大陀羅尼經·이하 무구정경)은 교과서적 통설대로 통일신라시대 유물일 가능성이 높다는 조사 결과가 나왔다. 석가탑에서 출토된 문서 뭉치인 묵서지편(墨書紙片)의 판독을 진행 중인 국립중앙박물관(이하 국박)이 27일 오전 연 ‘석가탑 발견 유물조사 중간보고’에서 확인된 사실이다.

국립중앙박물관, 석가탑 수리 기록문서 발견 41년 만에 판독

당초 학계에서는 석가탑 건립 시기를 8세기 중반, 탑 안에 넣은 무구정경은 이보다 앞선 시기에 제작된 걸로 보고 있었다. 그러나 석가탑에서 무구정경과 함께 나온 묵서지편이 석가탑 중수기(重修記: 건축물 등을 개·보수한 뒤 그 내용을 기록한 것)임이 2005년 9월 밝혀져 일부에선 무구정경이 고려 때 것일 수도 있다는 의혹을 제기했다. 석가탑이 건립 후 수리됐다면 무구정경은 그 수리 과정에서 새로 들어갔을 가능성도 있기 때문이다. 오랜 세월 동안 떡처럼 뭉쳐진 묵서지편을 낱장으로 떼어내고 순서를 맞춘 뒤 전문가의 해석을 거쳐야 하는 상황이었다. 국박은 이를 위해 올 4월부터 각계 전문가들로 ‘석가탑 발견유물 조사위원회’(위원장 천혜봉)를 꾸려 판독 작업을 해 이날 그 중간보고회를 열었다.

서울대 이승재 언어학과 교수와 노명호 국사학과 교수가 문서를 판독한 결과 고려 현종 15년(1024) 처음으로 석가탑을 해체하면서 무구정경 9편(篇)과 무구정니경 1권(卷)을 사리공에서 수습했다가 안장(安藏)한 것으로 밝혀졌다. 이때 ‘사리를 안장하되 전에 있던 물건들은 그대로 두고(前物不動)’라는 구절도 있어 다라니경이 신라 시대 석가탑 창건 때 안치한 것일 가능성을 뒷받침했다.

그러나 1038년 작성된 문서에는 ‘이 해 ○월 ○○일 대덕(大德·승려) 숭영(崇英)이 보협인다라니경을 (사리공에 매)납(納)했으며 얼마 뒤 무구정경 1권을 ○했다’고 적혀 있다. 이 교수는 글자가 지워져 있어 정확한 내용은 판독할 수 없으나 문맥상 ‘납(納)’으로 추정했다. 이렇게 되면 신라 때 목판본 무구정경을 탑 속에 넣은 뒤 고려 때 무구정경을 하나 더 넣었다는 얘기가 된다. 1966년 석가탑 발굴 때 무구정경은 하나만 나왔다. 이게 고려 때 것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게 됐다. 이에 성균관대 천혜봉 명예교수는 다라니경에 중국 당나라의 여제인 측천무후(재위 685∼704년)가 만든 측천무후자가 다량 등장한다는 점 등을 들어 현존 무구정경의 통일신라 제작설을 뒷받침했다.

27일 서울 용산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석가탑 발굴 유물조사위원들이 중간보고회를 열었다. [안성식 기자]

4개의 문서, 어떤 내용 담고 있나
두 차례 지진으로 탑 무너져 두 번 수리

석가탑은 통일신라 시대에 창건된 뒤 고려 때 두 차례의 지진으로 두 번에 걸쳐 수리
됐다. 석가탑이 언제 건립됐고 왜 수리됐는지도 이번 문서 판독으로 드러났다.

“정종 2년(1036)에 일어난 지진으로 석가탑은 버팀목을 사용해야 할 정도로 무너져 내렸다.”(1038년 중수형지기(重修形止記))

문서들은 두 차례 발생한 고려 때 지진의 상황을 자세히 적고 있다. 1036년의 지진으
로 불국사 곳곳이 무너져 내리는 심각한 피해를 봤다는 것이다. 게다가 석가탑을 수리 중이던 정종 4년(1038) 또 지진이 일어났다.

석가탑 창건 연대는 765년 이전이라는 단서도 얻었다. 문서에는 ‘김대성이 경덕왕 원년(742)에 세우기 시작해 혜공대왕 대에 완성했다’(1024년 중수기)는 내용과 ‘김대성이 경덕왕 즉위년에 개창했고 태자인 혜공대왕이 완성했다’(1038년 중수형지기)는 내용이 각각 적혀 있다. 혜공왕이 즉위한 것은 765년이므로 1038년 문서에 따르면 석가탑은 765년 이전에 완성된 셈이다. 한편 삼국유사에는 경덕왕 10년(752) 완성했다는 기록과 김대성이 시작해 혜공왕 때 완성했다는 기록이 나란히 나열돼 있다.

◇문서의 구성=묵서지편은 ▶고려 현종 15년(1024) 불국사무구정광탑중수기 ▶현종 15년 불국사무구정광탑중수형지기 ▶고려 정종 4년(1038) 불국사서(西)석탑중수형지기▶정종 4년 불국사서석탑중수형지기 추기(追記)의 네 가지 문건으로 구성됐음이 이번에 확인됐다. 이 중 현종 때 중수기는 불국사의 창건 내력과 역사, 1차 해체 중수와 그 내용 등을 담았으며, 같은 해 중수형지기는 이에 소요된 각종 지출과 수입을 날짜별로 정리했다. 정종 4년에는 2차 중수 내용과 그 보충 내용을 기록해 두 개의 문건으로 남겼다.

이 밖에 1038년에 작성된 ‘불국사탑 중수 보시 명공 중승 소명기(佛國寺重修布施名公衆僧小名記)’도 이번에 판독됐다. 석가탑을 중수할 때 보시한 사람들의 직함·인명·물품 목록과 수량을 기록한 문서다. 묵서지편 외에 석가탑에서 나온 또 다른 종이뭉치로 무구정경의 필사본일 가능성도 제기된 바 있으나 아닌 걸로 판명됐다.

탑 ‘중수’ 사실 처음 알린 석가탑 판도라의 상자

1966년 석가탑 보수를 위해 탑을 해체했을 때, 그 안에서 귀한 유물들이 쏟아져 나왔다. 사리를 봉안해둔 공간 중심부에서 사리함 세트, 무구정광대다라니경 등이 나왔다. 사리함 주위엔 동거울 등이, 사리함 밖 바닥에서는 비단에 싸인 채 뒤엉켜 붙은 종이뭉치가 발견됐다.

당시 기술로는 이 뭉치를 낱장으로 떼어낼 수 없어 그저 ‘묵서지편(墨書紙片: 먹으로 쓴 종이뭉치)’이라 이름 붙여 다른 유물과 함께 국보 제126호로 일괄 지정했다. 2005년 9월 묵서지편에서 ‘중수기(重修記)’라는 글자가 판독됐다. 거의 ‘판도라의 상자’와 같은 충격이었다. 석가탑은 창건 이래 한 번도 수리되지 않았을 거라는 ‘믿음’을 깼기 때문이다. 석가탑이 지어질 때 들어갔을 걸로 봤던 무구정경의 제작 시기에도 의혹이 생겼다.

종이뭉치는 41년 만에 판독됐다. 노명호 교수는 “기술 발달로 묵서지편을 낱장으로 떼어내는 데는 성공했지만 두루마리를 상하좌우로 접은 상태에서 뭉쳐진 것이라 낱장의 순서가 뒤섞여 있었다”고 어려움을 털어놨다. 또한 고려 이두로 적혀 있는 데다 고유명사가 많아 문맥 파악도 쉽지 않았다. 노명호·이승재 교수는 110쪽으로 쪼개져 있는 문서를 판독하면서 퍼즐을 맞추듯 순서를 맞춰나갔다.

무구정경의 제작 시기는 여전히 수수께끼로 남아 있지만 조사위원회는 이번 문서 판독이 불교사·고려사·국어학 연구에 획기적 전기가 될 것으로 내다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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