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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수대] WMD게이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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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오병상 기자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양치기 소년은 거짓말쟁이가 아니더라도 늘 두 가지 비난에 직면한다.

하나는 '늑대가 온다'고 호각을 불었는데 늑대가 나타나지 않을 경우 받게 될 '엉터리'라는 비난이다. 늑대가 나타났다가 도망쳤을 수도 있고, 헛것을 보았을 수도 있다. 결과적으로 양을 잃어버리지 않았지만 소년은 호들갑스러운 거짓말쟁이로 매도된다. 다른 하나는 그런 비난에 주눅든 소년이 늑대가 양을 물 때까지 기다렸다가 호각을 부는 경우다. 역시 엉터리다. 거짓말은 아니지만 결과적으로 양을 잃어버렸기에.

정보를 다루는 스파이들은 양치기 소년과 같다. 국제정치를 주도하고 세계정보망을 관리하는 미국 정보기관들은 최근 몇 년간 그런 두 가지 비난을 차례로 받고 있다. 9.11이 터지자 '왜 미리 호각을 불지 않았느냐'는 비난을 받았고, 이라크에서 대량살상무기(WMD)가 나오지 않자 '왜 호들갑스럽게 호각을 불었느냐'는 추궁을 받고 있다.

사실 정보기관은 최고권력자인 대통령의 뜻에 충실하고자 했다. 1998년 케냐 미국 대사관에 대한 알카에다의 연쇄공격으로 2백여명이 숨지자 빌 클린턴 대통령은 알카에다 기지에 대한 폭격을 지시했다. 공교롭게도 당시 르윈스키 스캔들에 시달리던 대통령은 "추문을 덮기 위해 전쟁을 벌인다"는 내용의 영화 '왝 더 독'(Wag the Dog)이 개봉되면서 심한 조롱을 받았다. 그러자 대통령은 '1백% 확실한 정보'만을 요구했고, 정보기관은 주눅이 들었다. 테러리스트들이 미국 내 항공학교에 입학한다는 정보는 백악관에 보고되지 않았고, 항공기를 공중 납치할 것이란 정보에 대한 대책이 만들어지는 데 한 달이 걸렸다.

9.11 이후엔 상황이 달라졌다. 어지간한 테러 관련 첩보는 기정사실화됐다. 알루미늄관은 우라늄 농축 핵개발 시도로 간주됐고, 가스마스크는 화학무기 개발용으로 추정됐다. 98년 유엔 사찰단이 철수한 이래 이라크 내 WMD에 대한 정확한 정보가 없었지만 대통령은 확신에 차 전쟁을 시작했다.

WMD를 찾아내지 못하자 미국과 영국에서 정보의 오류에 대한 청문회가 열리게 됐다. 대량살상무기 게이트다. 워터 게이트나 화이트 게이트와 달리 수만명의 목숨을 앗아간 전쟁에 관한 진상 규명이다. 양치기 소년만을 탓할 사안이 아니다.

오병상 런던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