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예일법대 졸업장은 15센트 짜리'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예일 법대 학위도 마치 15센트 짜리로 밖엔 안보이더군요."

실패한 실력없는 변호사의 말이 아니다.

현재 연방대법원 재판관중 유일한 흑인인 클래런스 토머스가 법대를 막 졸업한 70년대 초반을 회상하면서 한 말이다.

토머스가 졸업한 예일 법대는 당시 소수민족우대법(Affirmative Action Policy)을 적용해 일부 소수계 학생들을 의무적으로 받아들이던 때다.

토머스 대법관은 지난주 새로운 자신의 자서전 '내 할아버지의 아들'을 내놓았다.

그는 책에서 자신 스스로 소수계 출신인 흑인이면서도 어떻게 올해 초 소수민족우대법에 반대하는 표를 던졌는지 자세히 설명했다.

그는 실제 재학중이던 법대내 10명의 흑인중 한명이었다. 당시 법대 총 학생수는 160여명.

당시 꿈으로만 생각하던 예일대 입학이 현실화됐지만 이내 토머스는 자신의 실력보다는 인종때문에 입학하게 됐다는 사실을 깨닫게됐다. 결국 그는 자신 스스로 '예일 법대생' 임을 증명하기위해 더 어려운 과목들을 선택해 좋은 성적을 받았으며 더 많은 시간을 공부에 투자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74년 졸업 후 그가 응모했던 10여개 로펌은 모두 그를 거절했다.

그는 책에서 "당시 예일대 법대 졸업장도 백인이 갖고 있느냐 흑인이 갖고 있느냐에 따라 다른 의미를 갖는다는 사실을 알게됐다"고 적었다.

이런 그의 생각은 이후 대법관에 임용됐을 때에도 계속됐다. 예일 법대는 대법관에 임용된 동문들의 사진을 학교에 게재하는 것을 전통으로 삼고 있는데 토머스의 사진만 빠져있다.

그가 극구 사양하고 있기 때문인데 이는 그는 대법관이 임용될때 자신과 애니타 힐과의 성추행 의혹을 이유삼아 반대의견을 펼친 일부 교수진들에게 불편한 심기를 갖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토머스는 74년 미주리주의 법무차관으로 일하면서 정식으로 법조계에 발을 들여놓는다. 58년 프린스턴을 졸업한 백인 법무장관 존 댄포드가 그에게 같이 일해보자고 제안해 이뤄진 것.

이후 댄포드가 의회로 진출하자 토머스는 로펌으로 발길을 돌렸다.

토머스 대법관은 81년부터 90년까지 연방교육부에서 민권관련 일을 했으며 90년엔 워싱턴DC 항소법원 판사로 임명됐다. 이후 그는 92년 아버지 부시에 의해 대법원 판사에 임용되는 등 승승장구했다.

한편 토머스는 책에서 아직도 자신의 법대 졸업장에 15센트짜리 가격표를 붙여 지하창고에 보관하고 있다고 전했다.

최인성 미주 중앙일보기자 [ichoi@koreadaily.com]

[J-Hot] '노대통령+이명박' 정책 제휴에 허 찔린 鄭

[J-Hot] 카타르 왕자 "한국인, 돈만 좋아하는 줄 알았다"

[J-Hot] 토슈즈 신은채 실오라기 하나 안 걸친 발레리나

[J-Hot] "이명박 부인 '1000만원대 가방'은 사위가 선물"

[J-Hot] 李 "김신일과 친한 친구지만, 요즘은 통 안만나"

[J-Hot] 채연 "김희철 싫었다…살다 저런 스타일은 처음봐"

[J-Hot] "반말 했냐?" 개그맨 조영빈, 소속사 직원 폭행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