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둑] '2007 KB 국민은행 한국리그' 55세 조훈현의 상상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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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2007 KB 국민은행 한국리그'
○ 조훈현 9단(제일화재) ● 박지훈 5단(대방 노블랜드)

◆장면도=백을 쥔 조훈현 9단이 돌연 백1로 두어왔다. 제일화재 응원군들의 얼굴이 잠시 흙빛이 된다. 백 두 점은 완벽하게 죽어있다. 거기에 한 점을 더 보태는 이유는 뭘까. 미세한 바둑이지만 끝내기만 잘 한다면 백이 이기는 바둑인데 또 그 유명한 덜컥수가 등장한 것일까.
 예전 같으면 ‘조훈현’ 하면 먼저 ‘묘수’를 떠올렸지만 언제부턴가 상황은 변했다. 특히 초속기인 한국리그에서는 눈을 의심케 하는 착각으로 이긴 바둑을 자주 역전당하면서 조 9단은 어느덧 ‘불안한 존재’라는 이미지를 띠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번엔 분위기가 다르다. 착각이라면 흑2로 잡을 때 조 9단의 입에서 비명소리부터 튀어나올 텐데 백3 끊어가는 손길에 힘이 넘친다. 백1은 덜컥수가 아니라 기막힌 묘수였던 것이다.

◆실전진행(1~13)=백1부터는 외길 수순이다. 중앙 대마가 끊긴 흑은 6으로 넉 점을 잡고 살았으나 백은 7로 죽어 있던 두 점을 살려낸데 이어 9부터 13까지 흑 넉 점을 잡아 어마어마한 전과를 올렸다. 55세가 된 조 9단은 이제 흰머리가 가득하다. 그러나 석 점으로 키워 죽인다는 발상은 그야말로 놀라운 상상력. 그 수부터 여기까지, 30초 초읽기 속에서 긴 수순을 번갯불처럼 읽어낸 조훈현의 감각도 여전히 싱싱하게 살아있었다. 이 판은 백이 8집반승을 거뒀는데 이 부근의 이득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제일화재는 주장 이세돌 9단이 루이나이웨이 9단에게 패배했음에도 대방 노블랜드를 3대2로 꺾고 8승4패로 2위를 지켰다.

박치문 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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