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운의 건청궁' 98년 만에 제 모습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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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청궁 내 왕비가 거처하던 곤녕합 옥호루가 18일 공개됐다. 1895년 을미사변 때 일본인 폭도들에 의해 명성황후가 시해된 비극의 장소이기도 하다. [사진=김성룡 기자]

1887년 3월 고종은 경복궁의 궁중궁인 건청궁(乾淸宮) 일대에 가로등을 세워 전깃불을 밝혔다. 조선 최초의 전깃불로 에디슨이 전기를 사용한 지 8년 만이다. 중국이나 일본의 궁성 설비보다 2년을 앞질렀다.

고종식 근대화의 현장, 건청궁이 3년여에 걸친 복원공사를 마치고 18일 모습을 드러냈다. 1909년 일제가 철거한 지 98년 만이다. 문화재청은 이날 복원된 건청궁을 공개하며 20일 일반 관람을 시작한다고 밝혔다.

경복궁 북쪽 동산정원인 녹산(鹿山)과 향원정 사이에 자리 잡은 건청궁은 창덕궁 연경당과 낙선재처럼 사대부 저택과 비슷한 양식을 갖췄다. 규모는 양반가옥의 상한선인 99칸의 2.5배 되는 250칸이다. 사대부가에서 안채와 사랑채를 구분 짓듯 왕의 거처인 장안당, 왕비의 거처인 곤녕합, 그리고 부속 건물인 복수당 등으로 구성돼 있다.

건청궁은 1873년, 재위 10년 만에 흥선대원군의 섭정에서 벗어난 고종이 세웠다. 홀로서기를 시작한 고종은 이 궁중궁에 '하늘은 맑고(乾淸), 땅은 평안하며(坤寧), 오래도록 평온하게 지낸다(長安)'는 기원을 담았다.

장안당을 중심으로 오른쪽 곤녕합 쪽은 한식으로 짓고, 왼쪽에는 중국식 벽돌 건물인 집옥재를 지었다. 장안당 뒤에는 옥호루라는 반3층 서양식 건물을 지었는데 현재는 터만 남아 있다. 집옥재 옆에는 서양 시계탑이 들어섰다. 전통 사회에서 시각을 정하는 것은 군주의 고유한 권한, 고종은 전통 시계인 자격루(물시계) 대신 서양 시계를 들였다.

서울대 이태진(국사학) 교수는 "혼합된 건물 양식, 전깃불, 시계탑 개설 등은 군주가 서양 문물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겠다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건청궁은 지금껏 조선 왕조가 몰락한 현장으로 더 알려져 있다. 1895년 명성황후가 이곳에서 일본인 자객에게 시해됐기 때문이다. 을미사변 당시 일본 일등영사 우치다 사다쓰지(內田定槌)의 보고서에 따르면, 황후는 장안당 뒤뜰에서 살해된 뒤 옥호루에 잠시 안치됐다가 뒷산인 녹산에서 불태워졌다.

고종은 이듬해 10여 년간 기거한 건청궁을 떠나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한다. 이때부터 건청궁은 그 기능을 상실하며 1909년 일본인들에 의해 헐려 사라졌다. 그 자리에는 조선총독부 미술관이 들어섰고 한동안 국립현대미술관으로 사용되다가 1998년 철거됐다.

이 교수는 "건청궁 복원을 계기로 고종의 근대 국가 만들기가 재조명돼야 한다"고 말했다.

건청궁 일반 관람은 경복궁 홈페이지(http://www.royalpalace.go.kr)의 인터넷 예약 접수를 통해 1일 6회 실시한다.

권근영 기자 , 사진=김성룡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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