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이 보험 들어줬다면서요? 효녀네 효녀"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저라고 왜 부모님 보험 안 들어드리고 싶겠어요. 학교 마치고 어학연수 1년 갔다 오고 나니 취업은 남 얘기고 살 길도 막막해요. 효도는 커녕 사람 구실이나 제대로 하면 좋겠는데… TV 광고에서 '딸이 보험 들어줬다면서요? 효녀네 효녀' 할 때마다 그 아줌마 죽이고 싶어요" -취업 준비생 이정연(26·가명)씨

"왜 그 광고 있잖습니까, 유치원생 꼬마들이 '우리집에 갈래?' 하면서 비싼 아파트, 그럴 듯한 놀이터에서 노는 거요. 그거 볼 때마다 마음이 무겁고 한숨이 절로 나옵니다. 이제 갓 백일이 넘은 제 아들, 유치원 들어갈 즈음에는 저도 저런 아파트에서 살아야 하는데 요즘 아파트 값이 장난도 아니니 말이죠. 나중에 제 아들이 친구도 못 데려올만큼 초라한 집에서 부모 원망 하면서 자라게 되면 어쩌죠?" -직장인 서동명(36·가명)씨

"얼마 전에 보험하는 친구한테 부탁해서 종신보험 하나 더 가입했습니다. 친구가 종종 보험 가입을 부탁하긴 했어도 망설이다 사양하곤 했는데 이번엔 제가 먼저 전화를 걸었죠. 왜 그랬겠습니까, 죽어서 자식들에게 조금이라도 더 주고 싶은 마음에서죠. 이 세상에 없어도 대학 입학 시키고 행복한 결혼 시키는 아버지가 있다는 광고, 볼 때마다 뜨끔 했는데 이제 좀 마음이 놓입니다. TV 광고처럼 10억은 아니어도 다만 조그만 집 한채 정도는 해줄 수 있을 것 같네요" -자영업자 최경수(52·가명)씨

현대인들이 '광고 스트레스'에 시달리고 있다. '광고 스트레스'란 광고를 보면서 느끼는 스트레스를 말한다. 최근 '비호감 광고'라고 꼽히는 아파트 광고, 보험 광고 등이 가장 대표적인 광고 스트레스의 주범이다.

R아파트의 광고는 여러번 언론과 여론으로부터 뭇매를 맞았다. 한 여성이 사랑하는 남자를 데리고 부모님께 인사시키러 가는 길, 집이 어디냐고 묻는 애인에게 여성은 고급 아파트를 가리켜 보인다. 이어지는 멘트는 "수정씨 집은 R아파트입니다"고 말해준다. 유치원생 꼬마가 또래 여자친구에게 "우리 집에 갈래?" 하고 묻는 광고도 마찬가지다. 신나게 놀던 여자 아이는 "내일 또 와도 돼?"하며 웃고, 또 "창준이네 집은 R아파트입니다"고 말해주는 목소리가 들린다.

광고 스트레스는 수정씨나 창준이가 아니라 그들의 부모에게서 발생한다. 딸이 남자친구를 데리고 왔을 때, 아들이 여자친구를 데리고 왔을 때 부끄럽지 않은 집을 보여줘야 하는 사람들이 바로 그 부모이기 때문이다. 자신은 못 입고 못 먹어도 자식들에게만은 최고의 인생을 선물해주고 싶어하는 대한민국 부모들 사이에서는 그 스트레스가 더욱 크게 다가온다.

죽어서도 자식 걱정을 해야하는 부모들에게 P생명사의 종신보험 광고도 적지 않은 스트레스를 줬다. 광고는 "이 세상에 없어도 대학 입학을 시키는 아버지가 있습니다. 이 세상에 없어도 행복한 결혼을 시키고 가족과의 약속을 지키는 아버지가 있습니다. 가족의 가슴 속에 변함없이 살아있는 아버지. 당신은 그런 아버지입니까"라고 묻는다. 큰 보험료를 남기고 죽는 아버지만이 가치있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 정작 이 시대의 아버지들은 자신의 존재 이유가 대학을 보내고 결혼을 시키는 것만은 아닐 것이라 생각하면서도 용돈을 아껴 종신보험에 가입한다.

광고 스트레스는 자녀들에게서도 나타난다. 연금보험이나 노후보험 광고가 자녀들을 괴롭히는 대표적인 스트레스 광고다. A 실버 보험 광고에서는 시장에서 장을 보던 한 아주머니가 주변 상인들로부터 "딸이 보험들어줬다면서요? 효녀네 효녀"하며 부럽다는 인사를 듣는다. 부모님께 보험을 들어드리지 못한 자녀들은 광고를 보면서 속이 뜨끔하다. 특히 이정연 씨 같은 취업 준비생들은 그 스트레스가 더 크게 마련이다.

제품 브랜드나 회사 이미지를 홍보하는 광고는 사람들의 흥미를 자극하고 관심을 끄는 데 그 목적이 있다. 그런데 이런 광고가 스트레스를 준다면 그 효과가 얼마나 있을까?

서울대학교 곽금주 교수(심리학과)는 "보는 사람들에게 위화감을 조성하는 광고는 부정적인 인식을 심어주고 스트레스를 준다"고 말했다. 때문에 오히려 광고 효과를 반감시킬 수 있다는 의견이다. 곽 교수는 "다른 사람의 삶과 내 삶을 비교하는 욕구는 모든 인간이 가지고 있는 것"이라며 "광고에서 당연하듯 표현되는 상황은 보는 사람의 비교 욕구를 자극하기 때문에 스트레스를 주기에 충분하다"고 설명했다. 특히 "최근 부동산 가격이 치솟는 등 노력 이외의 대가를 받는 사람들이 늘어나면서 상대적 박탈감과 양극화에 대한 스트레스가 더욱 커진 것도 한 몫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시청자들은 더욱 단호하다. "욕 먹는 것도 관심의 하나라고 한다면 할 말이 없다"면서도 "광고가 나오는 순간 채널을 돌리거나 TV를 꺼버린다는 생각은 못했을 것"이라고 말한다. 어딜 가도 스트레스 천지인 요즘 TV에서까지 스트레스를 받을 필요는 없으니까 말이다.

김윤미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