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칼럼>집단주의와 혐오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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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사람에게는 嫌惡圈이 있다고 한다.다른 사람이 너무 가까이 오면 경계하고 싫어지는 圈域이 있다는 말이다.다른 사람의 숨결과체취에 대한 거부감일 수도 있고,다른 사람이 다가오면 경계심을느끼는 동물적 본능일 수도 있다.일종의 동물적 이고 감성적인 프라이버시의 영역이다.
그 혐오권의 넓이는 어느 정도일까.
외국에 가보면 은행이든 우체국이든 대체로 접수해서 담당자와 일을 처리하는 사람만 창구에 나간다.다음 사람은 1~2m 떨어진 노란 줄이 그어진 대기선 뒤에서 기다린다.그래서 식당이나 은행에 늘어선 줄의 길이가 길다.옷 스치는 것을 꺼 리는 듯 간격을 충분히 두고 늘어서 있기 때문이다.서양인들의 체취가 강해서일까,그들의 개인적인 영역이 넓어서일까.
우리의 풍경은 사뭇 다르다.은행에 가 예금 자동인출기를 사용할 때는 뒤에 줄 선 사람들이 口臭가 느껴질 정도로 가까이 서서 모두 기웃거린다.번호를 누르는데 조금이라도 멈칫거릴라 치면누군가의 손이 쑥 들어와 이것을 누르라고 가리킨 다.여럿이서 훈수를 한다.좀 싫은 내색이라도 하면『도와주는데 별꼴』이라는 표정들이다.비밀번호고 뭐고 없다.모두 함께 들여다보는 판이니 말이다. 우리는 현금인출기 앞에서,지하철에서,버스정류장에서,동사무소에서,야구장 앞에서 서로 몸을 부딪치고 치대며 살아간다.
이렇게 몸을 부비고 치대는 가운데서야 우리는 同類意識을 느끼고紐帶感을 느끼고 비로소 安堵感을 갖는다.차별성은 거북스 러운 것이며 엄정하고 객관적인 주장은 귀찮은 일들만 만들어낼 따름이다.그래서 차라리 집단의 匿名性 속에 파묻히는 것이 안전하고 편안하다.그 가운데 부패 동아리가 생기고,無事安逸 동아리가 생기고,伏地不動 동아리가 형성된다.만약 누구 하나 그 속에서 딴목소리를 내고 따로 놀다간 말썽꾸러기 독불장군이나 별난 놈으로치부되어 따돌림을 받는다.이것이 오늘 우리의 集團主義,치대기문화다. 국.공립대학의 교수라는 사람들이 연구 실적에 따른 연구비 차등지급 원칙을 거부하고 똑같이 일괄지급할 것을 요구한 것도 바로 이런 치대기 의식의 한 단면이다.
核폐기물 처리장 설치를 놓고 어떤 지역 주민들이 갑자기 무슨환경론자들이 나 된 것처럼 과격투쟁에 나선다.반대의 까닭은 별로 없다.『하여튼 核 어쩌고는 무조건 안돼요』라는 이유 뿐이다.다른 지역에서도 그랬고,옆집도 반대하니까.자기 주장은 없고 남들과 함께 행동하고 같은 말을 하는 집단주의의 단면이다.
아마도 이런 치대기문화의 가장 큰 病的 현상은 思考의 集團性과 劃一性일 것이다.지난 군사문화 시절 도처에서 極右的 군사문화가 판을 쳤다.지식인들은 아부했고,기업은 유착했다.다른 주장은 異端的이고 反체제적인 것으로 간주됐다.
민주화의 바람이 불자 세상은 하루 아침에 進步論 一色이 됐다.그것이 지나쳐 한때 極左들의 목소리가 드높아지는 시절도 있었다.대학가에 人共旗가 휘날리고,주체사상이 무슨 經典처럼 열독되고… 하는 그런 擬似진보론 속에 모든 온건론은 침 묵했다.아니대학의 일부 교수들이나 학자들은 그것에 동조하고 아부까지 했다. 이제 또 무슨 사상의 극단적인 바람이 불어올 것인가.최근 대학 내의 主思派 행태를 폭로하는 용기있는 발언들이 빛을 보자갑자기 保守强硬의 소리들이 거세지고 있다는 느낌을 주고 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적어도 우리가 극단적 사고의 集團性으로 회귀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적어도 우리는 親北論者들이 進步로 둔갑하는 思想의 假面劇에 놀아나서도 안되지만 그 반사적 반발이 반드시 3共,5共,6共 군사통치 시절의 획일적 極右로 되돌아가서도 안되기 때문이다.
***民主化란 포용.개방 民主化란 다양한 주장과 사상이 서로갈등하고 긴장하는 가운데 포용되고 조화되는 開放체제이지 않으면안된다.할 말은 해야 하고 그것이 관용되는 사회여야 한다.
史上 최고라는 끈적끈적한 더위 속에선 치대기문화가 짜증스럽다.이젠 치대기식 집단사고에 대해서도 혐오圈의 영역을 좀 시원하고 널찍하게 잡을 때가 아닌가 싶다.
〈편집부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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