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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닉스 부활시킨 ‘삼성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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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희 회장은) 최근 수원에서 열린 선진제품 비교전시 행사장에서 극히 이례적으로 흥분을 감추지 않았고 반도체 부문을 강하게 질책한 것으로 전해졌다…. 이 회장은 특히 하이닉스반도체의 메모리 사업을 책임지고 있는 최진석 부사장이 삼성전자 출신인 점 등을 지적하며 질책의 강도를 더 높였다고 한다.’(9월 30일자 중앙선데이 기사)

이코노미스트 이건희 회장이 ‘격노’한 것은 삼성전자를 추월한 대상이 하이닉스였기 때문이다. 채권단 관리 상태인 기업이 세계 일류를 지향하는 삼성전자를 일부 부문에서 앞질렀고, 여기에 삼성전자에서 옮겨간 ‘최진석’이란 인물이 이번 반격을 주도했기 때문이다. 이건희 회장의 입에 오른 ‘최진석’이란 인물은 과연 누구란 말인가?

“삼성을 따라 한 것은 아니지만 벤치마킹했다. 내가 삼성에서 왔기 때문에 하이닉스 식구들에게 삼성 이야기 많이 해주면 싫어하는 사람도 있다. 그럴 때 내가 한 말은 이렇다. ‘4등이 1등 안 쫓아가면 어떡할 거냐?’ 한때 하이닉스 주식은 130원까지 떨어졌다. 우리끼리 커피도 한 잔 못 사먹는 주식이라고 했다. 이걸 바꾸려면 혁신밖에 답이 없다.”(최진석 하이닉스 부사장, 6월 14일 한국 공학한림원 조찬)

경북대 금속공학과를 졸업하고 한양대에서 재료공학 박사학위를 받은 최진석 부사장은 1984년 삼성전자에 입사했다. 이후 삼성전자 기술개발부 수석연구원, 삼성전자 RS운영그룹장(메모리 연구개발 담당), 기흥공장 메모리사업부 TW(12인치 웨이퍼) 팀장(이사)을 역임했다. 2001년 퇴사할 때까지 18년간 메모리 사업부에서만 일했던 사람이다.

올해 8월께 만났던 삼성전자의 한 관계자는 “하이닉스의 부활에는 최진석이라는 생산전문가가 있다”고 말했다. 그는 “최근 하이닉스의 수율(收率:정상품 비율)이 좋아진 것도 그 사람 작품일 것”이라고 추측했다.

“하이닉스 포기하지 마십시오”

최 부사장(당시 상무)은 2001년 10월 채권단 관리하에 있던 하이닉스 상무로 가게 된다. 하이닉스에 오자마자 최 부사장은 공장을 돌아봤다. 그의 일성(一聲)은 “해볼 만하다”는 것이었다.

당시는 하이닉스 생산 설비 노후에 따른 공장 폐쇄 여부까지 거론되던 긴박한 상황이었다. 설비를 돌아본 최 부사장은 당시 하이닉스의 주채권은행이었던 외환은행의 이연수 부행장을 찾아갔다.

“제가 삼성전자에도 있었고 하이닉스도 둘러봤는데 하이닉스는 충분히 가능성이 있는 회사입니다. 와서 보니까 정몽헌 회장이 기초 투자를 굉장히 많이 해서 투자 자금이 그다지 많이 필요치 않습니다. 투자를 최소화하면서도 생산 효율을 높이는 공정은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하이닉스를 포기하지 말아 주십시오.”

하이닉스 처분 문제에 대해 이 전 부행장 역시 머리를 싸매고 있을 때였다. 이 전 부행장은 “도표까지 가지고 와 열성적으로 설명하는 것을 듣고 마음이 움직였다”고 말했다.

이때부터 최진석 부사장은 하이닉스의 생산성 향상, 수율 향상을 위해 매달렸다. 0.18마이크론 미세가공 기술을 이용해 256메가D램을 생산해 냈다. 당시 0.18마이크론 이상에서는 반도체 회로를 그리는 포토공정에 주로 고가의 첨단장비인 스캐너가 쓰였지만 최 부사장은 기존 장비인 스텝퍼를 이용해 제품을 만들어 냈다.

2000년 4월부터 2001년 3월까지 하이닉스반도체 메모리 연구소장으로 있었던 박영준 서울대 교수(전기공학)는 “당시 최진석 제조본부장, 오춘식 개발생산본부장이 고가의 첨단장비인 스캐너 없이 0.13마이크론의 미세공정까지 1년 6개월에 걸쳐 개발했다”고 말했다. 이렇게 오 본부장이 개발한 기술은 최 본부장 손에서 제품화됐다.

박 교수는 “아무리 좋은 기술을 개발해도 생산에서 제대로 받아주지 못하면 회사로서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이런 부분에서 높은 수율로 생산을 가능하게 한 최 부사장의 공은 적지 않다”고 평가했다.

‘블루칩 프로젝트’라 명명된 이 개발프로젝트는 기존 장비로 첨단 제품을 만드는 것으로 추가 투자가 필요 없다. 반도체 업계 관계자는 “일반적으로 0.18마이크론 이하의 미세공정에서는 회로의 선폭이 얇아 미세 회로를 그리기 유리한 스캐너를 쓴다”면서 “좋은 제품은 대당 수백억원이 넘는 것도 있다”고 설명했다.

생산전문가인 그가 수율 향상과 생산성 향상에 매달리는 것은 간단하다. 장치산업인 반도체는 수율이 나빠지거나 생산량이 줄어들면 이익률이 급격히 떨어지기 때문이다.

“반도체에서 영업이익률은 정말 중요하다. 왜냐하면 20%가 넘지 않으면 투자를 제대로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자연히 영업이익률이 올라가면 경쟁력이 높아질 수밖에 없다.”

삼성전자 성공법칙 실행

삼성전자의 성공법칙을 몸소 경험해 봤고, 익히 봐온 그로서는 당연한 결론이다. 최 부사장은 추가 투자를 최소화하면서 생산 효율을 극대화하기 위해 노력했다. 모두 650개 공정을 거쳐 만들어지는 반도체의 각 공정을 0.1초라도 줄이는 방법을 연구했다. 개선 가능성이 발견되면 이를 곧장 실행에 옮겼다.

90도 각도로만 움직이는 웨이퍼 로봇 팔을 45도로도 움직일 수 있게 만들었고 그 결과 시간당 세정 웨이퍼는 2003년 150장에서 현재 300장 수준으로 늘었다. 공정당 1초, 또는 0.5초를 줄이면 수백 개의 공정을 거쳐 완성되는 메모리칩은 특성상 개당 수십 초에서 수 분이 빨라진다. 당연히 생산량은 늘어나게 되고 원가는 줄어들게 된다.

교보증권의 김영준 애널리스트는 “삼성전자에 비해 노후화된 장비로 생산성을 높인 것은 최 부사장의 역할이 컸다”고 분석했다.

그의 생산성 향상 방식은 그가 삼성전자 출신이라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현대 스타일로 이뤄졌다. 이는 그가 6월 공학한림원에서 한 강연에서도 알 수 있다. 그는 하이닉스가 어떻게 이렇게 좋아졌는지를 설명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직원들이 밤 늦게까지 일했다. 모두 정말 열심히 했다. 나는 밤 11시쯤 가서 팀장을 칭찬한다. 그리고 ‘또 올게’하고 나온다. 밤 12시쯤에 메일을 날린다. 답장을 주는 팀장이 꼭 있다. 팀장이 나와 있으면 나머지 식구들도 나와 있다.”

이쯤 되면 최 부사장의 일하는 방식이 어떤지 짐작할 수 있다. 최 부사장이 하이닉스에 온 후 ‘기네스 거리’ ‘최고주의 거리’ 등 삼성스타일의 ‘거리’들이 생겨났다. 하이닉스 관계자는 “조직별, 개인별 성과를 측정하고, 경쟁을 부추겨 생산성을 올리고 있다”고 설명했다.

하이닉스 이천 공장에는 상상하지 못한 기록들을 달성한 사람들을 ‘불가사(불가능을 가능케 하는 사람들)’로 선정해, 명예의 전당에 올린다. 현재 20명의 직원이 ‘불가사’로 뽑혔다.

또 업무목표를 달성한 직원들의 사기진작을 위해 ‘이것만은 내가 세계 최고로 정말 누구보다 잘한다’는 최고주의 거리와 눈에 띄게 향상된 기록을 벽면 빼곡히 붙인 기네스 거리 등 다양한 거리 공간을 조성해 직원들의 열정과 혁신을 이끌어 내고 있다.

사람 하나 바뀌었다고 매출 6조원이 넘는 기업의 생산성이나 수율이 한꺼번에 바뀔까? 서울대 박영준 교수는 “같은 쌀과 밥솥을 주고 요리법도 다 줘도 밥 하는 사람마다 밥맛이 다르다. 공장의 수율도 같은 거라고 보면 된다”고 비유했다.

대신증권 김영준 애널리스트는 “수율이 80%라면 500개 중 100개는 불량이라는 말인데 100개의 불량이 어떤 공정, 어떤 요인의 영향을 받았는지는 기계가 판단할 수 없다”고 설명했다. 메릴린치의 우동제 상무는 “삼성전자에 있을 때부터 최 부사장은 제조의 달인으로 정평이 나 있었다”고 말했다. 이건희 회장의 지론대로 한 사람이 회사의 운명을 바꾼 셈이다.

이석호·임성은 기자 lukoo@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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