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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폐기한 지폐 10조원 … '돈의 장례식장' 가보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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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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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일 오후 서울 남대문로 한국은행 본점의 화폐관리팀 내 정사실. 탁자마다 옛 만원짜리 지폐를 1000만원 단위로 묶은 돈 뭉치가 수북이 쌓여 있다. 탁자 옆엔 한 대에 10억여원씩 주고 독일에서 들여왔다는 5대의 최첨단 정사기가 ‘윙윙, 타닥타닥’거리며 지폐를 세고, 분쇄하는 소리에 정신이 없을 정도다.

한은 조현석 화폐관리팀장은 “구권을 신권으로 바꾸는 수요가 폭증하다 보니 직원과 기계를 풀가동해도 모자랄 정도”라고 말했다.

지난해 1000원·5000원권 지폐, 올해 1만원권 지폐가 새로 나오면서 한국은행의 지폐 폐기 물량이 사상 최고를 기록 중이다. 폐기 물량에 맞춰 새 지폐를 찍어내야 하는 조폐공사도 바쁘기는 마찬가지다.

◆지폐의 탄생과 죽음=조폐공사에서 지폐를 발행하면 통상 1000원·5000원권은 2년, 만원권은 4년6개월 정도면 수명을 다한다. 시중은행들은 지폐가 많이 손상됐거나 구권을 신권으로 교환해야 할 경우 지역별로 운영하고 있는 정사실에서 1차로 지폐의 계속 사용 여부를 감별(정사)한다. 폐기가 결정된 만원권은 1000만원 단위로 묶어 현금수송차량을 이용해 정사기를 갖춘 한은 본점과 8개 지역본부로 보낸다.

국민은행 황구하 팀장은 “보안을 위해 현금수송차량이 지폐를 운반하는 시점은 철통 같은 비밀에 부쳐진다”고 말했다.

한은에 도착한 지폐는 정사기에서 운명을 다한다. 정사기는 장수 계산, 지폐의 위·변조 여부, 사용 불가 지폐 분류, 분쇄를 담당하는 전천후 지폐 폐기용 기계로 1983년부터 단계적으로 들여왔다. 지폐를 자동 분쇄하는 정사기의 등장으로 지폐 다발에 구멍을 뚫는 일(천공 작업)도 90년대 초 사라졌다.

한은 김영선 과장은 “과거에는 부천 용해공장으로 지폐를 옮겨 화학물질로 지폐를 녹였다”며 “그러다 보니 지폐 운반 때 도난 등을 우려해 지폐 다발에 구멍을 뚫었던 것”이라고 설명했다.

정사기에서 분쇄된 지폐는 파이프를 타고 압축기로 보내져 원통 모양의 압축 폐기물이 된다. 지폐의 죽음이다. 하지만 이걸로 끝은 아니다.

김 과장은 “지폐는 종이가 아닌 100% 면 섬유로 만들어지기 때문에 압축 폐기물은 건축용 바닥재나 자동차 진동 완화용 패드를 만드는 데 활용된다”고 말했다.

◆지폐 폐기량 사상 최대=한은에 따르면 올 들어 9월까지 폐기 처리된 지폐는 9조2874억원어치로 지난해 폐기금액(5조9764억원)을 넘어서 역대 최고를 기록 중이다. 장수(13억200만 장)로도 이미 지난해(10억2600만 장)보다 많다. 만원권 한 장이 1.1g이므로 이는 5t 트럭 약 211대 분량에 달한다.

한은 정남석 발권기획팀장은 “올 9월 말까지 발행된 새 지폐는 모두 19조6479억원어치로 전체 지폐 유통량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65% 정도”라며 “아직도 전체 유통량의 35%에 달하는 구권 지폐들이 폐기를 기다리고 있는 셈”이라고 말했다.

김준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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