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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장제스와 천제루의 만남, 그리고 이별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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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호 26면

1924년 황포군관학교 교장 시절의 장제스(왼쪽)와 천제루. [김명호 제공]

1927년 8월 21세의 천제루(陳潔如)는 장제스(蔣介石)가 권하는 미국 유학을 떠났다. “정권을 장악하면 경제건설에 착수하겠다. 서양의 기술이 필요하다. 새로운 문화를 익혀라.” 결혼한 지 6년 만이었다.

상하이를 출발한 지 10일 만에 하와이에 도착했다. 중국 영사관 관원들이 영접했고, 현지의 국민당 열성당원들은 ‘국민혁명군 총사령관 부인 환영’이라고 쓰인 현수막을 내걸었다. 미국 언론도 중국의 통일을 눈앞에 둔 장제스의 부인 천제루의 미국 방문을 연일 보도했다. 그러나 며칠 후 주미 중국대사관 공보처는 “장제스 총사령관에게는 미국에 와 있는 부인이 없다”는 공고를 신문에 게재했다. 경악한 천은 황급히 목적지인 뉴욕으로 향했다. 그해 겨울 친구의 편지를 통해 장제스가 쑹메이링(宋美齡)과 결혼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천제루는 13세 때인 1919년 여름 국민당 4대 원로 중 한 사람인 장징장(張靜江)의 집에서 장제스를 처음 만났다. 당시 장제스의 직업은 증권 중개인이었다. 장징장은 동업자였다. 청방(靑幇)의 독무대였던 상하이의 증권교역소에서 이들과 결탁해 벌어들인 돈으로 홍등가에서 날을 지새우기 일쑤였다. 장제스는 큰 키에 러시아어가 유창한 천의 환심을 사려고 애썼다. 장은 한순간에 상대를 제압해 버리는 재능은 탁월했지만 성격이 불같아 사람을 설득할 줄 모르는 단점이 있었다.

무슨 일이건 순식간에 처리하지 못하면 스스로 해결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장징장의 부인이 천을 설득했다. 그러나 뒷조사를 해본 천의 모친은 완강했다. 고향에 부인이 있고, 아들이 있는 것도 큰 약점이었다. 장징장이 나서고 쑨원(孫文)까지 가세해 모친을 설득하는 바람에 장제스는 2년 만에 20세 연하의 천과 겨우 결혼할 수 있었다. 후일 장제스의 전기작가는 궁리를 거듭한 끝에 이때를 “총통의 도양(稻養·벼가 한참 자라던) 시기”라고 했다.

장제스는 쑨원의 부름으로 다시 군복을 입었고 쑨의 처제 쑹메이링도 알게 되었다. 장은 천에게 했던 것을 쑹에게도 그대로 반복했다. 장의 감정세계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후일 장과 쑹의 결혼을 정략결혼이라고 했지만 장은 이성문제에 있어서는 정략적이지 못한 사람이었다.

황포군관학교 교장이 되면서부터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 장제스는 숙원이었던 북벌(北伐)을 완수했고, 27년 4월에는 정변을 일으켜 세계를 놀라게 했다. 중국의 최강자로 부상했고 타임(TIME)지의 표지를 장식했다. 이미 눈앞에 쑹메이링이 아른거리기 시작했지만, 그가 가는 곳마다 모습을 나타낸 것은 공인된 부인 천제루였다.

천은 컬럼비아 대학에서 교육학을 전공하고 귀국해 상하이에 정착했다.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후 저우언라이(周恩來)는 천에게 “홍콩이나 미국을 자유롭게 다녀라. 언제 돌아와도 좋다”고 했다.

천은 홍콩을 택했다. 대만의 장징궈(蔣經國)는 ‘상하이 엄마(上海)’라 부르며 따르던 그를 위해 주룽(九龍)에 저택을 마련했다. 장제스도 쑹메이링 몰래 편지를 보냈다. “우리는 한 배를 타고 비바람을 헤쳐나갔던 날들이 있었다. 그때의 고마움을 잠시도 잊어본 적이 없다.”

천은 세상을 떠나기 직전 장제스에게 편지를 보냈다. “30여 년간 내가 얼마나 억울하고 분했는지 잘 알 것이다. 그러나 나는 군(君)과 국가의 명예를 위해 모든 것을 감수했다.”

천은 생전에 영문 회고록을 남겼는데, 장제스와 본인의 사후에 공개할 것을 조건으로 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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