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북한 시론

냉정과 열정 사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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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금단(禁斷)’의 군사분계선을 한국 대통령이 몸소 걸어서 넘는 상징적 행보는 감동을 자아낼 순 있어도 그 경계선을 허물 묘책까지 가져다주진 않는다. 남측으로부터 ‘귀한 손님’을 맞이하는 평양 시민들의 열렬한 만세합창에 가려진 그들의 궁핍과 숨은 고민을 외면해서도 안 된다. 일사불란한 아리랑 공연이 인간의 자유와 행복을 담은 예술이 아닐진대 너무 열광할 수도 없는 일이다.

노무현 대통령이 2일 만수대 의사당 방명록에 남긴 ‘인민의 행복이 나오는 인민 주권의 전당’이라는 덕담이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을 공인하는 열정으로까지 발전해서는 곤란할 것이다. 노 대통령은 또 이날 밤 김영남 상임위원장이 주최한 만찬에서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건강과 장수를 기원하는 축배를 제의하며 “그래야 북한 인민들도 편안해진다”고 했다. 인사치레라지만 북한식 독재와 사회주의 체제의 종식을 통일의 전제로 깔고 있는 대한민국 아닌가.

아무래도 좋다. 이번 남북 정상회담이 의미 있는 결과를 낸다면 그것으로 족하다. 노무현 대통령은 평양으로 출발하면서 남과 북이 평화정착과 경제협력을 기약하는 회담이 될 것이라고 했다. 욕심을 부리지 않고 실질적인 성과에 주력하겠노라고 했다. 그렇다면 북한 핵 문제를 안고 한반도에 온전한 평화를 정착시킬 수 없고, 북한의 개방 없이 남북 경제협력을 제대로 추진할 수 없다는 명제를 되새기면서 대북협상에 임해야 한다.

남북 정상회담 이튿날째인 어제 마무리 된 베이징에서의 6자회담은 북한의 연내 불능화와 핵 프로그램 신고 의사를 확인했을 뿐 진전된 성과를 내지 못했다. 이를 60일 이내에 이행하기로 했던 2·13 합의가 321일 시한으로 늘어났고 이 약속이 다시 깨져도 우리가 북한에 취할 수 있는 조치는 마땅치 않다. 엄존하는 북한 핵 위협을 외면하고 아무리 좋은 평화체제 및 통일방안에 합의한다 해도 모래 위의 집일 뿐이다. 평화와 통일의 결과가 아닌 이로 가기 위한 순차적 과정에 집중해야 한다.

북한에 국제사회의 자본과 기술이 자유롭게 드나들 수 없는 상황에서 본격적인 대북 투자를 결심할 기업인은 없을 것이다. 비즈니스인의 눈에는 북한은 아직 투자여건을 살피는 수준이지 이를 감행할 정도의 대상이 아니다. 그런데 이번 남북 정상회담을 준비하면서 내보인 정부의 대북경협 방안(제2의 개성공단과 경제특구 설치 등)은 본질적인 조건이 아닌 결과로서의 프로젝트에 집착하는 성격을 보인다. 남측 대표단의 구성을 보면 공식 수행원 13명보다도 많은 재계 인사 18명이 포함돼 있다. 이번 정상회담에서 합의하는 대규모 경제 프로젝트를 이들 재계에 떠맡기는 식의 결과가 나온다면 성과 없는 퍼붓기로 귀결될 것이다. 북한 당국이 얻고자 하는 경제지원에 그들의 개혁방안을 연계시키는 것이 실질적 남북 경협의 요체다.

오늘 아침 발표되는 남북 정상 합의문이 과연 내실 있는 실천방안을 담고 있는지 살펴야 한다. 자신을 위한 하루를 살기도 벅찬 국민에게 말로만 기약하는 평화와 통일을 내보이지 말았으면 한다. 7년 전 남북 정상회담에서 김정일의 면모가 세상에 처음 공개되었을 때 일었던 세간의 관심을 재차 기대한다면 오산이다. 정부로서는 기대 이하의 ‘흥행’이 걱정스러울 수 있다. 하지만 정작 우려해야 할 것은 흥행 부진이 아니라 흥행의 역효과다. 정부가 정상회담을 열정으로만 몰고 가려 할 때 국민은 이제 냉정한 평가로 균형을 맞추려 할 것이다.

김태효 성균관대 교수·국제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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