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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습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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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25년 전 일본에서 학교를 다닐 때 같은 반 친구 중 ‘문방구집 아들’이 있었다. ‘기요타’란 이름의 이 친구는 자신의 이름보다 ‘요로즈야’라는 문방구집 상호로 더 불렸던 기억이 난다. 또 같은 반에는 ‘이발소집 아들’로 불리던 ‘사세’란 친구도 있었다.

이들은 이제 ‘문방구집 사장’ ‘이발소 주인’이 됐다. 가게 위치도 25년 전 그대로다. 내로라하는 유명 사립대학을 나왔고, 오라고 하는 기업들이 줄을 섰지만 이 친구들은 별 주저함 없이 가업을 택했다. 한번 술자리에서 “가업을 이을 거면 뭐 하러 힘들게 일류대학에 갔느냐”고 농을 한 적이 있다. 이들의 대답은 같았다. “제대로 가업을 잇기 위해서”란다. 이들에게 가업은 곧 천직이다.

나카무라 간자부로(52)는 일본을 대표하는 가부키 배우다. 초대 나카무라 간자부로는 1598년생, 현 간자부로는 18대째다. 400년 넘게 이어지는 가부키 가문이다. 이름을 이어받는 습명(襲名)도 해 왔다. 세습 문화는 가부키뿐 아니라 노(能), 교겐(狂言) 등 다양한 분야로 퍼져 있다. 많은 가부키 배우 중에 이들의 명성이 유달리 높은 것은 단지 명문 가부키 가문 출신이라서가 아니다. 전문가나 일반 관객이 봐도 표정이나 몸짓 하나하나가 뭔가 다르다. 가문의 명성에 먹칠하지 않기 위해 남보다 몇 배의 피눈물 나는 노력을 어려서부터 해 왔기 때문이다. 그래서 관객은 환호한다. 요즘 세상에서 실력 없는 명가란 살아남을 수 없다.

전통예능 분야는 아니지만 ‘세습’ 하면 일본 정치를 빼놓을 수 없다. 25일 총리에 취임한 후쿠다 야스오도 부친이 총리를 지냈다. 1991년 이후 취임한 일본 총리 10명 중 7명이 ‘세습’이다. 후쿠다 총리는 취임 후 즉각 장남을 총리 정무비서관으로 채용했다. 다음 대를 위한 세습구도다. 그래도 일본 사회는 별 불평불만이 없다. 한국 같으면 “웬 말이냐”며 들고 일어났을 일이다. 일본 신화에 등장하는 초대 진무(神武) 천황부터 현재까지 천황가가 황위를 세습해 왔다는 이른바 ‘만세일계(萬世一系)’를 믿기 때문일까. 하지만 실력 검증 없인 대를 이을 수 없는 전통예능의 세계와 달리 정치의 세습은 어째 곱게 보이지만은 않는다.

이참에 부자세습이란 공통분모를 갖는 부시 미국 대통령, 후쿠다 일 총리, 그리고 북한의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3자회담’을 열어 세습 정치의 장단점을 허심탄회하게 토론해 보면 어떨까 하는 엉뚱한 생각도 해본다.

김현기 도쿄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