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거기 그녀가 서 있는걸 보았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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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그래 우린 정말 아무 생각도 안해.생각해보면 그래 우린 정말우리가 한심하고 창피해.우린 가끔 울고 싶기도 하고 그래서 가끔은 진짜 울기도 하지만 그렇지만 우린 그냥 울 뿐이야.하품을하다가 눈물이 나고 그러다가 괜히 울적해져서 울기도 하지만 그냥 답답해서 우는 거지 뭐.뭐가 뭔지 모르기 때문에,특별히 꼭울어야 할만한 일이 없기 때문에 우는 건지도 모른다구.
써니 네 말대로 우리도 정말 우리가 답답하다니까.
뭘 걱정해야 되는지 뭘 사랑해야 하는지 뭘 슬퍼해야 하는지,뭣 때문에 괜히 짜증이 나는 건지 우린 그것도 잘 모르거든.그래,우리가 알려고 하지 않아서 모르는 거라고 해도 할 말은 없지만 말이야.
우린 하여간 질문하는 걸 아주 싫어하거든.공부시간에 질문 많이 하는 놈들을 쪼다라고 놀리면서 우린 질문하지 않는 거야.공부시간이나 어른들하고 있을 때에는 그저 조용히 있는 거야.말해봐야 입만 아프니까 라구 속으로 그러면서.말해봐야 괜히 복잡해지기만 하니까 그러면서.
그렇다고 뭐 우리가 어른들에게 입이 아플만큼 무언가를 말해보거나 한것도 아니야.우리가 배운 건 사실 그저 재빠른 눈치 뿐이거든.눈치로 때려 잡는 거 있잖아.그런 건 하나를 찍어놓고도맞는지 틀리는지를 자기가 모르는 거잖아.
그러면서 어떤 때는 오히려 우리가 벌써 너무 많은 걸 알아버린게 아닌가 하고 그게 후회되는 거 있지.우린 벌써 어떤 일에도 잘 놀라지 않는 거야.벌써 다 싱거운 거라구.내 말 알아?다 싱겁단 말이야.
해외토픽이나 만화나 비디오는 그런대로 재미있지.거기엔 별난 것들이 많으니까.우리들 바로 곁의 일들은 재미가 없어.우린 지겨운데 우릴 자극시키는게 없는 거야.새로 나온 전자오락같은 것도 재미있기는 하지만 며칠 지나면 벌써 그것도 지 겨워져.다 그런거지 뭐.알잖아.
우리끼리 말하는 걸 가만히 들어보면 정말 웃긴다구.
너 얼마 있니,어디 갈 거니,했어 안했어,뭐 그런 말들이야.
언제나 의문문으로 시작되고 그 대꾸만으로 끝나는 거야.그냥 자기를 설명할줄은 모른다니까.하기야 우린 무언가 설명할만한 걸 갖고 있지 못해서 그런 건지도 모르지.더군다나 남 에게 설명해주고 싶을만한 나 자신을 갖는다는 건 더 어려운 일이잖아.
우리는 어떤 때 가끔은 얼싸안고 싶은 친구를 발견하기도 하지만 우리는 사실 그러지도 못하지.그 애가 여자애라는 이유로,아니면 같은 남자녀석이라는 이유로.우린 어른인 척하면서 그러다 보니까 더 심심해지는 거야.
그러면서 우리는 무언가가 우리를 흥분시켜주기를 원하지.무언가우리를 미치게 해주기를 원하고 우리를 열광시켜주기를 원하고 우리를 통곡이라도 할 수 있게 만들어주기를 원하지.무엇이든 우리를 좀 더 긴장시켜 주고 우리를 좀 더 절실하게 하고 좀 더 짜릿하게 만들어주기를 기다리고 있는 거야.그러다가 우리는 그저좀 더 아슬아슬한 연애를 꿈꿀 뿐이지 뭐.
껀수와 별볼 일을 찾아 두리번거리다가 우리는 어떤 때 퍼뜩 피곤해져버리지.그럴 때쯤이면,이제는 그저 귀찮다는 이유만으로 너무나 많은 걸 휘익 아무렇게나 집어던져버리고 마는 거야.
뭐 좀 더 화끈한 건 없을까… 그래봐야 점점 더 심심해지기만한다는 걸 이제는 우리도 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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