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 포럼] 시인과 사무라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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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그럴싸한 제목에 끌려 책을 잡았다가 내용에 실망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과대 포장된 제목에 속았다는 느낌이 든다. '세상에 나쁜 책은 없다'는 믿음으로 버텨보다가 바쁜 일 등을 핑계로 결국은 중도에 포기하는 경우도 있다. '요즘처럼 책 안 보는 시대에 그나마 몇 줄이라도 읽었으면 됐지'하는 자기변명도 해 가면서.

이런 경험칙이 최근 깨졌다. '시인과 사무라이'(행림출판)-근사한 제목이 눈길을 잡았다. 원로작가 김성한(85) 선생이 10년 전 일본에서 출간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난(豊臣秀吉の亂)'을 최근 우리말로 개편한 것이다. 내용도 뻔하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을 다룬 역사 소설로 대부분 알고 있는 내용이었다. 역사적 고증에 충실한 데다 서술도 객관적이어서 극적인 긴장도는 다소 떨어진다. 쉽게 말하면 밤 새워 읽게 만드는 무협지류는 아니었다. 그러나 나는 이 책을 중도에 포기하지 않았다.

무엇 때문일까. 그렇고 그런 내용에도 불구하고 이 책 세 권을 한숨에 내리읽게 한 힘은 분노였다. 백성들의 고통은 안중에도 없는 위정자들이 분노의 원천이었다. 특히 시인으로 묘사된 선조는 조선 5백년 역사상 가장 무능한 군왕이었다. 일본군이 파죽지세로 밀고 올라오자 도망치기에 바빴고 여차하면 중국으로 내뺄 태세였다. 간신과 충신을 가리지 못해 하는 일마다 그르쳤다. 그나마 나라를 건진 것은 이순신 같은 소수의 위대한 장수들과 분연히 일어선 의병들이었다. 이들이야말로 진짜 만고충신이었다.

사무라이로 묘사된 히데요시와 그 졸개들의 만행은 다시 소개할 필요도 없다. 닥치는 대로 무고한 양민을 학살한 그들을 당시 일본 기록도 '지옥의 옥졸(獄卒)'로 불렀다. 7년 대란에 나라는 결딴나고 백성들은 도륙당했다. 굶주린 백성들은 시체까지 뜯어먹으며 연명했고, 심지어 힘센 자가 약한 자를 잡아먹는 생지옥까지 연출됐다. 그래서 임진왜란 이후 이 땅에서 시를 이야기하는 것은 사치이거나 위선이라는 생각도 든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당시 조선은 일본에 당할 수밖에 없었다. 문약 (文弱) 에 빠진 조선의 엉터리 시인들은 1백년간의 내전으로 전쟁 기계가 된 일본 사무라이들을 제대로 알지 못했다. 사농공상의 사(士)가 선비가 아닌 무사 (武士) 라고 우기는 일본을 야만시하며 애써 무시하려 했다. 일본 사신이 최첨단 신병기인 조총 (鳥銃) 을 보여주자 우리에겐 대포가 있다며 허세를 부렸다. 한마디로 내치건 외교건 백치 수준이었으니 애초에 싸움이 되질 않았다.

어쨌든 그 시인과 사무라이는 이제 가고 없다. 그러나 과연 그런가. 유감스럽게도 시인과 사무라이는 아직도 현재진행형이다. 붓과 먹물을 우대하고 쟁기나 기름을 홀대하는 것이 옛날과 다르지 않다. 이공계 홀대와 이에 따른 이공계 기피 현상이 이를 웅변한다.

4백여년이 지난 지금도 전쟁은 계속되고 있다. 총칼 대신 경제와 기술로 무기만 바뀌었다. 일본은 달아나고 중국은 추격하는 가운데 우리 입지는 갈수록 좁아진다. 정말로 경제 사무라이가 필요한 시점이다. 사무라이가 거슬리면 전사 (戰士) 라도 좋다. 십만이고 백만이고 나라를 먹여 살릴 기술자와 인재를 양성할 때다. 그런데도 사무라이, 아니 낭인들이 몰리는 곳은 정치판뿐이다. 이공계 대책이라는 것도 언 발에 오줌누기식 미봉책뿐이다.

'이태백''삼팔선'에 국민의 분노는 하늘을 찌르지만 총선에만 매진하는 정치인들도 옛날과 똑같다. 무능의 대명사였던 선조나 당시 얼치기 시인들의 전철을 되풀이하지 말자. 역사에서 교훈을 얻지 못하면 역사는 반드시 반복이란 이름으로 보복하니까.

유재식 문화담당 부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