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거기 그녀가 서 있는걸 보았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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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시말서 혹은 반성문」이라는 제목을 쓰는 주제에 왜 쓸데없는이야기를 늘어놓느냐고 하실 분이 계실지도 모르겠습니다.하지만,비 갠 새벽길을 한손에 사과를 들고 다른 한손으로는 써니의 손을 잡고 걸어다녔다는 것,써니가 이름도 모를 보 라색 꽃을 꺾기 위해 다리 아래쪽으로 뛰어갔다 왔다는 것,그동안 나는 다리난간에 기대어 비 때문에 불어난 개울물을 내려다보면서 알퐁스 도데의 「별」을 생각했다는 것 등등을 여기에 적는 까닭은,우리가 그 여행에서 얻은 선물이 무엇이 며 또 무엇이 우리를 진짜로 기쁘게 했는지 하는 걸 설명하고 싶은 욕심에서 입니다.아마도 쓸데없는 노력일 테지만요.
써니와 내가 여관방으로 돌아갔을 때,날은 이제 완전히 밝았는데,몇 명인가는 일어나 있었고 몇 명은 여전히 잠들어 있었고 그랬습니다.빈 술병과 과자 따위가 방안의 여기저기에 널려 있었고 재떨이로 쓴 깡통 주위에는 넘쳐난 꽁초 몇개가 굴러다니고 있었습니다.그런 광경 가운데에 서 있자니 우리들의 지난밤이 찧고 까불며 놀았음에도 불구하고 실상은 매우 썰렁했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자 다들 일어나.비는 다 지나갔다구.』 내가 이불을 벗겨내면서 소리쳤습니다.
꾸물꾸물 맨 마지막에 일어난 상원이가 눈을 비벼대고 있을 때였습니다.누군가 여관방 미닫이문을 요란하게 활짝 밀어젖혔는데 양아였습니다.양아는 언제 밖으로 나갔는지 툇마루 위로 운동화를신은 채 올라서서 문을 연 거였습니다.그애는 문 간에서 안으로들어서지를 않고 방안의 우리를 내려다 보고 서있었습니다.양아의얼굴은 아주 하얘졌고 표정은 무표정이었습니다.
『양아 너 어디 갔다 오는 거야.』 『얘 빨리 들어와서 문닫아.사람들이 보잖니.』 여럿이 양아를 향해서 뭐라고들 했는데 양아는 여전히 무표정이었습니다.누군가,쟤가 약 먹었나…그러는데양아의 몸뚱아리가 일자로 앞으로 푹 쓰러졌습니다.문지방 근처에있던 애들이 양아의 몸을 받아주지 않았다면 양아의 얼굴은 아마묵사 발이 됐을 겁니다.
어 이거 왜 이러지…아냐 얘 진짜 약 먹었나봐…가만 있어보라니까…아냐 얘 언젠간 그런다면서 약을 가지고 다녔거든….
우리 중의 하나가 눈꺼풀을 뒤집어봤습니다.너 그렇게 하는 건어디서 배웠어…아냐 그냥 영화같은 데서 본거지 뭐….
하여간 양아의 눈에서는 흰자위밖에 보이지 않아서 아주 무서웠습니다.저쪽 시장 쪽으로 조금만 가면 병원이 있대.누군가 소리쳤습니다.그래도 파트너랍시고 상원이가 양아를 등에 업고 시장 쪽으로 뛰었습니다.양아는 원래 덩치가 크기도 했지 만 온몸이 축 늘어지니까 더 무거워 보였습니다.
무슨 의원이라고 쓰인 간판이 걸린 유리문을 십 분쯤 마구 흔들어대니까 머리가 벗겨진 아저씨가 양미간을 좁히면서 문을 열어주었습니다.흰가운을 입는 걸 보니까 그 대머리 아저씨가 의사였습니다.의사가 가리키는 침대에 양아를 뉘었습니다.
양아의 주머니에서 세코날이라고 쓰인 약 껍질이 발견되자 대머리 의사는 무슨 대책이 서는 모양이었습니다.
『허리띠를 풀어주고 스타킹도 좀 벗겨줘.』 의사가 그러길래 이렇게 보니까 양아의 스타킹은 팬티스타킹이었지만,정말이지 그런걸 따질 경황이 아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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