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림동 고시촌에도 강남과 강북이 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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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다시피 장기화된 경기침체로 인해 청년 실업이 50만 명에 육박하고 있는 이때, 미래에 대한 철저한 준비를 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겠습니까?”
오~! 우리의 엔디가 드라마 <논스톱>에서 두꺼운 뿔테 안경 쓰고 숨차게 외우던 대사를 기억하는가? 그렇다. 청년 실업자 수가 50만에서 100만으로 바뀌었을 뿐, 미래에 대한 철저한 준비를 위해, 살아남기 위해 고시촌 생활을 마다 않는 이들은 여전히 존재한다.
신림동 고시촌, 30년간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고시촌으로 독특한 문화를 지속시키고 있는 ‘그들만의 거리’를 들여다보았다.
2호선 서울대입구역에서 마을버스를 타고 ‘고시촌’이라는 정거장에서 내렸다.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희한한 패션의 고시생들. 무릎 나온 추리닝과 아저씨 반바지, 흰 양말에 샌들. 잠시 내 눈을 의심했다. 말로만 듣던, 고시생은 이럴 것이다 하고 상상만 하던, 아니 시대극에서나 보던 그 패션이 최첨단 21세기에도 그대로 존재하다니! 이곳은 정녕, 두꺼운 육법전서의 앞장과 뒷장 사이에 시간이 갇힌 거리인가?
물론 헌 책방, 서점, 고시학원, 고시뷔페, 소형마트 등 즐비한 상점가를 속속 들여다보면 그 옛날(?)과는 사뭇 달라진 고시촌의 거리를 엿볼 수 있다.


#67세대들의 강북 거리 : 1960~70년대 생 대입고사출신 고시생들이 모인 거리
신림동 삼성산 비탈을 따라 걸어가 보니 지은 지 20~30년은 족히 돼 보이는 노후된 건물들이 많이 남아 있었다. 한옥을 개조해서 만든 다세대 원룸은 옛 고시생들의 생활을 미루어 짐작케 하는 건물이었다. 동네 어귀에는 오래된 철물점, 간판 없는 식당, 고시생들이 주전부리를 사는 소형마트가 위치해 있었다.
동네 마트에서는 ‘까치 담배(한 갑으로 팔지 않고 말 그대로 한 개피 씩 파는 담배)’도 팔고 있었다. 최근 도심에서는 쉽게 볼 수 없는 것인데…. 알고 보니 어떡하든 담배를 끊고 싶어 하는 고시생들을 위한 주인의 배려라고 한다. 가격은 한 까치에 200원. 꽤 비산 가격이지만 그래도 제법 잘 팔린단다.
67고시생은 가까운 삼성산을 이용해 운동을 즐긴다. 가끔은 마을버스 정류장 앞에서 기타를 치며 풍류도 즐기고. 또 시간이 나면 1곡에 200원하는 오락실 노래방 부스에 가서 노래도 부르고, 15년의 전통을 자랑하는 만화방을 찾기도 한단다. 사법시험을 준비하는 K씨(37)는 “시끄러운 아랫동네보다 적막함과 고요함이 있어서 전 여기가 좋아요. 이런 게 고시촌의 매력이지 않나요?”라며 웃는다.


#78세대들의 강남 거리 : 1970~80년대 생 수능고사출신 고시생들이 모인 거리
역시 돈이 최고다. 신림동 아랫동네는 화려한 스위트 고시 룸이 즐비한, 말 그대로 신림동의 강남이다. 최근에는 원룸 공급업체들이 경쟁력을 갖기 위해 싱크대와 가스레인지, 냉장고, 에어컨, 고급 텔레비전을 기본시설로 갖춰 신세대 고시생들을 끌어들이고 있다고.
골목 사이에는 고시생들이 쉴 수 있는 저렴한 노천카페와 적당히 놀 수 있는 술집들이 새 단장을 마치고 들어서 있다.
“단기간에 좋은 환경에서 공부하고 이곳을 빨리 빠져 나가야 한다”는 것이 아랫동네를 좋아하는 78세대들의 주장이다. 서울대 경영대를 졸업한 K씨(28)는 “시간도 금이다. 가까운 거리에 모든 필요한 생활시설들이 모여 있어야 시간을 아낄 수 있다”며 아랫동네를 선호하는 이유를 말한다.
신림동의 강남거리에는 ‘될놈 서점’, ‘꿈 이룸 마트’, ‘2차전용 고시룸’ 등 신세대 감각에 맞게 간판들도 재미있다.


#고시촌에 있는 것과 없는 것
신림동에 비록 강남과 강북 거리가 있어서 공부하는 환경이나 세대는 달라도 이들에게는 분명한 공통분모가 있다. 바로 ‘고시합격’이다.
행정고시를 준비하고 있는 P씨는 “신림동 고시촌이 다른 곳과 이질감이 느껴지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어느 곳에서 공부를 했느냐보다, 얼마만큼 이 시간을 빨리 넘기고 빠져나가는가, 이것이다”라고 말한다.
신림동 고시촌을 아래 위로 네 시간 정도 돌아다니다 보니 바깥세상에는 있지만 이곳에는 없는 것들이 떠올랐다. 짖는 개, 백화점, 대형마트, 음악이 흘러나오는 레코드 가게, 의류 가게, 노점트럭이 없다. 소음이 적은 동네…신림동 고시촌은 걸으면 걸을수록 조용해지고 차분해지는 거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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