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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지도층의 거듭된 망언(사설)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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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역사의 과오를 바로 보지 못하는 민족은 그 저주받은 역사를 운명적으로 되풀이한다.』 독일이 2차대전중 유대인을 학살한 잘못을 반성하는 교육장이자 기념관으로 개조한 지난날의 수용소 전시실 입구에 써붙인 한 미국 철학자의 말이다.
일본의 아시아에 대한 침략사를 해방의 역사라고 우기는 일본 법무장관 나가노 시게토(영야무문)의 발언에 이제는 이런 말로 대답해줄 수 밖에 없다. 그러면서 또 한편으로는 일본의 진정한 얼굴은 무엇인가 묻지 않을 수 없다. 한국을 식민지화하고,중국대륙을 침략하고,동남아시아까지 전쟁으로 몰아넣은 일본 군국주의를 스스로 어떻게 평가하는가. 일본이 패전한뒤 이른바 평화헌법 아래 번영해온 지난 50년동안 끊임없이 제기됐던 물음이다.
그 50년동안 일본정부를 대표한 지도자들이 유감이다. 잘못된 점도 있다는 등 적당한 수준에서 여러차례 말해왔다. 그러고 나선 지난 역사를 정당화하며 그런 발언을 뒤엎는 각료나 고위관리의 발언이 뒤따르곤 했다. 그러나 최근들어 일본에 새로운 연립정권이 들어서며 우리는 그러한 악순환이 끝날 것으로 기대하고 그 앞날을 축복했다.
1차 개혁연립정권의 호소카와 모리히로(세천호희) 총리가 지난날의 어떤 정치지도자보다 솔직하고 과감하게 과거 역사에 대해 반성하고 사과의 뜻을 표명하는 것을 보고 우리는 이제는 한일 두나라가 진정으로 미래지향적인 관계를 정립해나갈 수 있으리라 기대했다. 또 2차 연정의 하타 쓰토무(우전자) 총리 역시 일본의 잘못을 거듭 강조해 우리로서는 상당한 기대를 걸고 있었다.
그러나 나가노 법무장관의 발언을 접하고 우리는 그런 생각이 실제 일본사람들의 본심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다시 갖지 않을 수 없다. 더구나 그의 발언은 지금까지 역사에 대한 어느 누구의 망언보다 더욱 고약하다. 정당화하고 미화하려는 발언은 있었지만 그처럼 태평양전쟁을 「식민지로부터의 해방전쟁」이라고 노골적으로 말한 일은 없었다. 또 종군위안부 문제를 얼버무리거나 축소하려는 시도는 있었지만 그처럼 강제로 끌려간 한국의 희생자를 「공창」이란 모욕적인 언사로 표현한 일도 없었다. 일본 지도층에 이러한 의식을 가진 인물이 있는데 진정으로 이웃나라와 미래지향적인 관계를 맺어나갈 수 있겠는가.
보통국가론을 내세워 일본의 국력에 맞도록 국제적으로 기여한다는 구실로 평화헌법을 개정하는게 일본 새 정치세력의 구상이다. 안보리 상임이사국 자리를 희망하고 세계적인 지도국가로 발돋움하자는게 그들의 꿈이다. 나가노 법무장관이 바로 그런 꿈을 추진하는 개헌론자이자 개혁세력의 일원이라는데서 우리는 더욱 경계하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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