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진국 노사관계 달라진다] 일본 노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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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4일 일본 시즈오카(靜岡)현 아타미(熱海)시에서 열린 금속노협(勞協)의 춘투(春鬪)대책 토론회.

"일본의 구조적인 고비용 체질이 문제입니다. 국제경쟁력을 키워야 합니다. 노조도 '돈, 돈'외치는 시대는 지났습니다. 근로환경 개선 등 보다 종합적인 관점에서 노동운동을 할 때입니다."

금속노협의 스즈키 가쓰토시(鈴木勝利)의장의 이 같은 발언에 토론회장은 일순 술렁거렸다. 자동차.전기.철강업종 산별노조를 하나로 묶은 거대 조직의 수장으로부터 '사(使)측 얘기'를 듣게 될 줄은 미처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변화는 비단 금속노협뿐이 아니다.

조선중기(造船重機).비철(非鐵)연합도 올 노사협상을 앞두고 일찌감치 "수익력 확보와 재정 재건을 위해 앞으로 2년간 임금인상을 동결하겠다"고 먼저 사측에 제안했다. 지난해 일본 기업들은 전체 상장기업의 70% 이상이 2002년보다 이익이 늘었다. 올해도 80% 이상이 "좋아질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이런 분위기라면 올 봄 노사협상에서 산별 노조들마다 앞다퉈 기본급 인상을 강하게 요구할 법하다.

그러나 실제 사정은 전혀 다르다. 현재 일본 내 노조의 중앙조직인 '렌고(連合)' 산하 산별노조 61개 중 기본급 일괄인상을 요구한 곳은 사철(私鐵)총련 단 한 곳밖에 없다.

이는 기업마다 나이나 근속연수 등에 따라 임금을 매년 자동적으로 올리는 정기승급제(호봉제)를 폐지한 곳이 많아져 각사 공통의 임금제도가 사실상 사라졌기 때문이다. 노조들이 실력행사를 무기로 단합해 일괄적으로 얼마를 올려달라고 요구할 수 있는 기반 자체가 무너진 것이다. 근로자들의 노조 가입률은 지난해 전후 최저인 19.6% 수준으로 떨어졌다.

또 미래에 대한 불안 때문에 노조원들이 임금투쟁보다는 인사평가 시스템의 개선이나 정년 후 재고용을 요구하는 등 노사문제의 테마 자체가 변하고 있다.

예컨대 전기연합은 이번 춘투의 주요 과제를 '일과 가정을 같이 지킨다'로 잡았다. 배우자가 출산하면 닷새 휴가를 얻겠다는 것이다. 또 철강.조선중기 노조인 '기간(基幹)노련'은 "60세 이후의 취업 확보", 생산 증가로 인해 시간 외 근로시간이 늘고 있는 자동차총련은 "총노동시간의 단축"을 제1 목표로 내걸고 있다.

1990년대 초 버블(거품) 붕괴 이후 통한의 '잃어버린 10년'을 보낸 개별 기업 노조들의 신중한 자세도 노사문화의 변화에 한몫 하고 있다.

도쿄=김현기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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