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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깜도 안 되는' 가이드라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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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깜도 안 되는 의혹이 많이 춤추고 있다."

노무현 대통령이 지난달 31일 PD연합회 창립 20주년 행사에 참석해 한 말이다. 마침 정윤재 전 청와대 의전비서관의 청탁 비리 연루 의혹을 검찰이 보완 수사하겠다고 나선 직후였다.

검찰이 고유권한을 행사하려는 순간, 대통령이 나서서 "수사할 만한 일이 못 된다"라며 미리 선을 그어버린 셈이다. 당장 한나라당에선 "가이드 라인 제시"라는 비판이 쏟아졌다.

사실 노 대통령은 예전에도 여러 차례 비슷한 발언을 했다가 구설에 올랐다.

2003년 5월 '386 최측근' 안희정씨가 나라종금 관련 의혹 사건으로 검찰 수사를 받았을 때는 "그는 나로 말미암아 고통받는 사람"이라고 두둔했다.

같은 해 10월 최도술 청와대 총무비서관이 대기업으로부터 11억원을 받은 사건이 터졌을 때도 노 대통령은 "돈의 용도에 대해 선의를 믿고 있다"고 주장했다.

비슷한 시기에 자신의 보좌관 출신인 이광재 의원이 '썬앤문' 사건으로 특검 대상에 올라 사표를 냈을 때도 "특별한 잘못이 없는데 물러난다"고 옹호했다.

2002년 대선 후보 시절 후원회장이었던 이기명씨의 용인 땅 매매계약 의혹이 2004년 6월 제기됐을 당시의 반응도 마찬가지였다. "선생님이 당하는 고초를 생각하면 밤잠을 못 이룬다"는 글을 직접 청와대 홈페이지에 올렸다.

물론 '팔은 안으로 굽게 마련'이라는 말로 넘어갈 수도 있다. 하지만 발언자가 대통령이기에 이 발언들은 모두 위태로운 성격을 띠게 된다. 대통령중심제 국가에서 최고권력자인 대통령의 말 한마디는 검찰의 수사 의지를 위축시킬 수 있을 만큼 위력적이기 때문이다.

이러다 보니 한나라당에선 3일 "노 대통령이 조폭식 의리 정치를 한다"(나경원 대변인)는 비난까지 나왔다. "무슨 범죄를 저질러도 '내 사람'이면 괜찮다"는 식의 논리로 검찰을 압박하고 있다는 지적이다.

실제로 노 대통령의 '깜도 안 되는…' 발언이 정 전 비서관에 대한 검찰 수사에 영향을 끼칠지는 아직 미지수다. 하지만 만약 정 전 비서관에 대한 수사가 또다시 유야무야된다면 국민은 정말 의심하게 될 것이다. '노 대통령의 발언이 정말 가이드 라인이 아니었나' 하고.

남궁욱 정치부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