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r.황세희의몸&마음] 정신의학으로 본 거짓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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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복더위와 함께 수시로 찾아오는 게릴라성 소나기. 지구 온난화와 맞물린 낯설고 후덥지근한 올여름 날씨는 거리를 활보하는 연인들의 발걸음마저 뜸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푹푹 찌는 더위에도 서울대병원 후문 거리에는 탄원성 시위를 벌이며 자신의 존재를 알리려는 사람들이 있다.

 2년 전 세상을 경악시켰던 논문조작 파문의 주인공 황우석박사를 지지하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논문 조작을 밝힌 정명희 교수 등을 비난하는 플래카드를 걸어놓고 하루를 보낸다.

 황 박사 논문의 문제점은 이미 세계 과학계가 인정한 사실이다. 이 명백한 현실도 황 교수를 과학 영웅으로 신앙처럼 믿었던 지지자들의 생각을 바꾸지는 못한 듯하다.
 사실 기대와 상반되는 진실을 직면하는 일은 누구에게나 견디기 힘든 고통이다. 현실 인정과 동시에 실낱 같은 희망을 버려야 하고, 자신의 치부를 만천하에 드러내는 상황에 처한다. 또 자존심이 짓밟힌 비참한 상태에 놓이기도 한다. 이럴 땐 누구나 진실을 외면하고 싶은데, 바람이 강렬해지면 진실 자체를 덮고 부정하는 단계에 이른다.
 정신의학적으로 힘든 고통의 감정에 빠지는 것을 막기 위해 스스로를 보호하는 정신적 방어기전이 작동하기 때문이다. 방어 양상은 힘들었던 일을 적극적인 노력으로 지우는 ‘심인성 건망증’, 속 편한 방향으로 거짓된 기억을 하는 ‘기억착오’ 등 다양한 형태로 나타난다.

 얼핏 봐선 의도적인 ‘거짓말(lie)’과 고통을 피하려는 무의식적인 ‘부정(denial)’, 또 자신의 거짓말에 도취된 나머지 스스로도 진실인 양 믿어버리는 ‘공상적 거짓말(pseudologia fantastica)’을 구별하기는 힘들다.

 20년 전, 이란-콘드라 스캔들(미국이 반미 성향의 니카라과 혁명정부를 전복시키고자 이란에 무기를 불법적으로 밀매 한 뒤 수익금으로 콘트라 반군을 몰래 지원한 사건)이 터졌을 때, 레이건 대통령은 일관되게 자신은 이 사실을 몰랐다고 주장했다. 당시 거짓말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대통령에게 거짓말 탐지기를 사용해야 한다는 의견도 있었지만 진실은 덮인 채 마무리됐다.

 가짜 박사 사건의 장본인 신정아씨도 사실이 드러난 뒤에도 끝까지 “예일대 박사학위를 받았다”는 말을 반복했다. 역시 거짓말인지, 공상적 거짓말 상태인지 현재로선 알 길이 없다.

 거짓말 형태는 이처럼 다양하나 자신의 ‘이익 추구’라는 공통 목적을 가진다. 거짓말로 파생된 피해 정도, 양심의 가책 여부 등에 따라 심각성을 차별화해야 하는 이유다. 예컨대 태연한 상습적 거짓말쟁이와 들통나기 직전에라도 잘못을 시인한 뒤 자리에서 물러난 사람 간에는 인격 차이가 크다.

 어떤 거짓말이건 인간적 측면에선 이해가 된다. 하지만 오랜 세월 수많은 사람을 속인 거짓말쟁이, 거짓말로 얻은 유·무형의 이득을 즐기고 누린 사람, 스스로의 거짓말에 도취된 사람 등은 모두 정신건강이 병든 상태이며 치료가 필요하다. 이들이 제대로 치료 받지 않은 상태로 교육자로, 정치 지도자로, 영향력 있는 공인으로 활동하는 일은 적절한 여과장치를 동원해 막아야 한다. 수많은 사회 구성원의 정신 건강이 덩달아 손상되는 상황을 예방하기 위해서다.

황세희 기자·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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