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운하 총경 징계가 부른 경찰 내분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25호 05면

이찬원 중앙일보시사미디어 기자

“역사적 사건을 배태한 근본원인을 찾으려는 노력 없이 표피적 현상(퇴진 요구)만을 보고 판단하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은 없다.”

수사권 독립 ‘대변인’ 손보려다 #수뇌부 고립 불러

그의 주장이다. 하긴 혁명을 징계하진 않는다. 하지만 이택순 청장을 포함한 경찰 수뇌부는 혁명으로 보지 않았다. 중징계감인 ‘하극상’이었을 뿐이다. 이런 인식 차이가 ‘경란(警亂)’을 불렀다.

경찰 수뇌부가 황운하 총경의 석 달 전 발언을 문제삼아 징계안을 밀어붙이자 일선 경찰에서 반발 기류가 퍼져나갔다. 경찰대 동문회가 ‘집단궐기’ 일보 직전까지 갔다. 황 총경은 경찰대 1기 출신이다. 전·현직 경찰관 1만7000여 명이 가입해 있는 무궁화클럽 회원 수십 명은 경찰청사로 몰려가 “이택순 퇴진” “황운하 징계철회”를 외치며 시위를 벌였다. 일부 퇴직 경관은 분신까지 시도했다. 반발이 커지자 급기야 청와대 대변인까지 나서서 이 청장을 엄호하기도 했다. ‘일개’ 총경의 인사문제가 왜 이리 파장을 일으킨 걸까.

황 총경은 경찰 지휘부엔 ‘트러블 메이커’, 검찰에겐 ‘기피 1호 경찰’로 꼽힌다. 반면 수사권 독립을 바라는 일선 경관들에게는 ‘영웅’ 대접을 받는다. 10년 넘게 검찰과 경찰 수뇌부를 향해 끊임없이 수사권 독립을 요구해왔기 때문이다. 그는 일선경찰서 중간간부이던 1990년대 중반부터 경찰 내부통신망을 통해 수사권 독립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2005년에는 경찰청 수사권조정팀장을 맡아 검·경 대립의 최전선에 섰다. 지난해 3월 대전 서부경찰서장으로 있을 때 피의자를 검찰 청사에 보내라는 검찰의 요구를 공개 거부했다. 동시에 경찰 지휘부가 수사권 독립에 미온적이라고 비판했다. 이로 인해 경찰종합학교로 자리를 옮겨야 했다.

거침없는 행동으로 황 총경은 수사권 독립의 상징이 됐다. 반면 이택순 현 경찰청장은 이전 다른 경찰청장들에 비해 수사권 독립에 미온적인 태도를 취해왔다는 게 일선 경찰의 대체적인 평이다. 그런 청장이 ‘상징’을 손대려 하자 반발 기류가 순식간에 확산된 것이다. 황 총경은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사태의 원인은 무엇인가.

“결국 수사권 독립 문제다. 수사권 독립 문제에 관해 이택순 청장은 매우 미온적이었다. 조직 내부에 이 청장이 수사권 독립을 물 건너가게 했다는 불만이 잠재돼 있었다. 이 청장이 (김승연 회장 보복폭행 사건을 검찰에) 수사 의뢰까지 하니까 ‘그럴 줄 알았다’는 분위기가 팽배했다. 그런 상황에서 나를 징계하려 하자 퇴진운동이 벌어진 것이다.”

-이 청장은 수사권 독립에 왜 소극적인가.

“철학과 신념이 부족할 때 소극적일 수 있다. 소신이 강하다면 그렇겐 안 하겠지…. 나름대로 (검찰을 자극하지 않으려는) ‘전략적인’ 판단으로 그럴 수 있다. 그렇더라도 잘못된 전략이다.”

경찰 내부통신망에는 황 총경의 주장과 궤를 같이하는 글들이 줄줄이 올라와 있다. 거의 대부분 이택순 청장에게 ‘항명’하는 글이다. 그중 일부다.

‘2006년 혼연일체가 돼 수사권 독립을 완성코자 했을 때 이택순 청장은 자신을 믿고 참아달라, 조용하게 반드시 추진하겠다고 전 경찰관에게 얘기했다. 그런데 (그 후) 한마디라도 했는가. 안 해도 좋다. 그런데 수사권 독립을 위해 노력해온 황운하 총경은 왜 쫓아내려 하나.’

황 총경은 이 청장이 조직의 불신을 받고 있는 만큼 사태가 쉽게 정리되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내게 예상보다는 가벼운 징계가 내려져 반발하던 그룹들의 강도가 수그러든 것 같이 보일 수 있다. 하지만 경징계라도 징계가 강행될 경우 청장 퇴진 운동이란 입장에 변화가 없는 것으로 안다. 청장 퇴진운동이 다시 일어날 여지가 있다. 물론 내가 그쪽과 교감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국민에겐 경찰의 분열이 좋지 않게 보일 수 있다.

“그런 부분은 마음이 아프다. 그러나 내부의 건강성을 보여주는 기회도 된다. 경찰이 보신에 급급한 사람들로 꽉 찬 게 아니고… 불이익을 감수하더라도 할 말은 하는 민주적 조직임을 보여주는 것일 수 있다.”

-청와대도 황 총경의 행위가 하극상이란 시각이다.

“조직적이고 집단적인 힘으로 수장을 몰아내려 하는 것이 하극상이다. 그러나 한 개인이 청장 사퇴를 ‘건의’한 것까지 하극상이라고 표현할 수 있나. 경찰청장이 어떤 잘못을 해도 용퇴를 주장해선 안 된다는 것은 의사소통에 성역이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그럼 경찰은 굉장히 비민주적이고 폐쇄적인 조직으로 있어야 하나.”

그는 징계를 받아들일 수 없다는 입장이다. 징계 자체가 헌법이 보장한 언론·표현의 자유를 침해한 위헌적 조치라는 것이다. 그래서 소청과 민사소송을 동시에 낼 계획이다. 경정(警正·총경 밑의 계급) 시절 그는 직위해제 조치를 당한 일이 있다. 잠시 직위해제됐다가 복직할 수 있었지만 이때도 불복해 소청을 제기했고, 결국 승리한 바 있다. 경찰 내부 게시판에선 황 총경을 위한 ‘부징대금’(부당한 징계 대응을 위한 기금) 마련 운동이 벌어지고 있다. 지난달 29일까지 100여 명이 440여만원을 모았다고 한 경찰관은 전했다.

경찰 고위직 중에는 “황 총경의 행동이 너무 지나쳤다”고 비판하는 사람도 적지 않다. 한 경무관(총경 바로 위 계급)은 “황 총경이 정치판에 나오는 것 아니냐”고까지 말했다. 하지만 그를 잘 아는 경찰대 1기 출신 간부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황 총경은 우직한 사람이다. 분명 정치에 참여하려고 수사권 독립을 외쳐온 게 아니다. 지금도 그렇다. 하지만 내부상황이 황 총경을 밀어낸다면 그땐 모르는 일 아니냐.”

익명을 요구한 또 다른 경찰 간부는 이런 말을 했다.

“이택순 청장을 임명한 사람들 정도나 청장이 잘했다고 하겠지. 얼마 전 전직 경찰청장 한 분을 만났는데, 그 양반까지 이 청장이 부적절했다고 하더라.”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