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한책읽기Review] “부(富)는 어디서 나오나” “진화의 경쟁서 창출되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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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0면

부의 기원
에릭 바인바커 지음,
안현실 외 옮김,
812쪽 2만8000원

 모든 분야의 학자들이 다 그렇겠지만 경제학자들 역시 자기 전공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하다. 경제학을 제국주의 학문이라고 자랑하는 사람도 많다. 경제학 잣대로 경제현상은 물론 정치나 문화, 스포츠 등 비경제적인 현상까지도 분석해 해법을 내놓고 있어서다.

그런 반면 경제학은 숱한 오류로 점철돼있다거나, 가짜 이론들로 가득 차 있는 학문이란 비판도 상당하다. 조안 로빈슨이라는 영국 경제학자는 “경제학을 공부하는 이유는 경제학자들에게 속지 않기 위해서”라고 잘라 말한다. 경제학자의 주된 임무는 틀리는 데 있다는 비아냥도 있다. ‘경제학은 없다’라거나 ‘경제학의 위기’라는 비판은 경제학계에서는 단골 메뉴에 속한다.

 이 책 역시 이런 단골 메뉴 중 하나다. “전통 경제학은 틀렸다”고 과감하게 주장하기 때문이다. 다만 기왕의 비판과는 달리 주장이 매우 체계적이고 종합적이라는 게 인상적이다. 가령 지은이는 “연역적 합리성을 지닌 인간은 현실의 실제 모습과는 거리가 멀다”고 지적한다. “인간은 전적으로 이기적이거나 이타적이지 않다”고 주장도 있다. 이런 비판은 이전에도 많았다. 자선을 베푸는 이타적 인간, 당첨가능성이 제로에 가까운 복권을 사는 비합리적인 사람들이 숱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지은이는 단순한 비판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한발 더 나아가 현실은 “역동적인 활동으로 가득 찬 사람들이 와글와글하는 꿀벌통”, 즉 복잡계 또는 복잡 적응시스템이라고 인식한다. 사람들은 이런 세상에서 가장 성공적인 질서를 창조하기 위해 ‘진화의 경쟁’을 하고 있으며, 이를 통해 부가 창출된다고 주장한다. 복잡계 경제학이라는, 요즘 한창 뜨는 경제학적 대안을 내놓고 있는 것이다.

 지은이는 또 전통 경제학의 다른 가정과 이론들도 잘못된 게 수두룩하다고 한다. 경제는 항상 수요와 공급이 같아지는 균형상태에 도달한다는 핵심 이론도 틀렸다. 현실시장은 결코 공급과 수요가 같아지는 상황에 이르지 못한다는 것이다. 지은이는 이를 ‘설탕만 존재하는 설탕섬(슈거 스케이프)’이란 특이한 가상공간을 통해 입증한다.

 경제학의 임무는 미래 경제의 예측과 현실 경제의 설명이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경제학이 수학을 빌린 것도 이를 통해 인간의 심리 움직임을 사전에 파악해 경제를 예측하려는 목적 때문이었다. 그런데 전통 경제학은 이런 근본적인 임무를 제대로 이행하지 못하고 있다.

1920년대의 대공황을 예측하지 못한 거야 그렇다고 쳐도, 경제학이 고도로 발달한 20세기 후반에 일어난 중남미나 아시아의 금융위기도 예측하지 못했다. 심지어 노벨 경제학상을 받은 두 경제학자들이 투자전략을 짠 금융회사 ‘롱텀 캐피털’조차 일순간에 망했다. 그런데도 경제학자들은 “우리의 모델(이론)에 의하면 이런 일은 일어날 수가 없다”라고 변명한다.

 그러니 전통 경제학은 버리고, 대신 복잡계 경제학을 받아들이자는 제안에 솔깃할 수밖에 없다. 물론 지은이는 그것이 전통경제학을 완벽하게 대체할 만큼 다듬어지지는 않았고, 과학이라기보다는 ‘프로그램’에 여전히 가깝다고 한다. 그러면서도 “세계의 지적 조류는 복잡계 경제학 쪽으로 확고하게 돌아섰으며, 이 개념이 앞으로 수 십 년 동안 경제학의 이론과 실제의 기반을 제공할 것”이라고 확신한다. 숱한 장점이 있다는 이유에서다.

가령 전통 경제학에서는 거의 설명하지 못하는 부의 기원도 설명할 수 있다. 부는 곧 지식이고, 지식은 진화를 통해 창출된다는 것이다. 결국 부의 근원은 진화라고 믿는다는 점에서 지은이가 생각하는 복잡계 경제학의 뼈대는 진화경제학이다. 또 각자가 사익을 추구할 경우 사회 전체의 이익이 최대가 되지 않는 이유, 빌 게이츠의 사업 전략이 미래예측이 아니라 불확실한 미래에 대비하도록 하는 학습인 배경, 빈곤이 개인의 잘못도 아니지만 부자들의 착취 때문도 아니라고 주장하는 까닭 등이 설명된다.

 공감이 가는 주장들이 참 많다. 그러면서도 복잡계 경제학이 전통경제학을 대체할 수 있을지 의문이란 생각은 머리를 떠나지 않는다. 과거의 수많은 비판들도 지나고 보니 변종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설사 그렇다고 하더라도 경제학으로선 하등 손해 볼 게 없다. 복잡계를 통해 경제학의 내용은 훨씬 풍성해 지기 때문이다.

김영욱 경제전문기자

복잡계 이론

어느 장소에서 일어난 작은 사건이 그 주변의 다양한 요인에 작용을 하고, 그것이 복합되어 차츰 큰 영향력을 갖게 됨으로써 멀리 떨어진 곳에서 일어난 사건의 원인이 된다고 생각한다. 처음에는 현대의 복잡한 경제현상을 해명하기 위해 사용되던 것이었지만, 현재는 물리학, 생물학 등 온갖 분야에 적용해 사용할 수 있는 이론으로 쓰이고 있다.

슈거 스케이프

브루킹스 연구소의 조슈아 엡스타인과 로버트 액스텔이 경제발전 과정을 알아보기 위해 1995년 실시한 컴퓨터 시뮬레이션. 실험에 따르면 시간이 흐름에 따라 80%의 설탕을 20%의 사람이 소유하는 ’80-20 규칙’이 나타났다. ‘파레토 분포’라 불리는 부의 양극화 현상뿐 아니라 변수를 추가할수록 경기순환이 발생하는 등 단순한 시장에서도 결코 ‘균형’에 이르지 못했다.

롱텀 캐피털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 마이런 숄스와 월 가의 스타 존 메리웨더가 1994년 공동 설립한 초대형 사모펀드를 말한다. 이 회사는 전통경제학 이론에 따라 러시아 국채 선물을 대거 매입하고 미국 국채는 공매도하는 차익 거래에 집중했으나 98년 러시아 경제위기로 러시아 국채가 휴지로 변하면서 자본금의 50배 달하는 1000억 달러의 손실을 입고 파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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