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달의시>박태일의 "여항..."와 서정주의 "산청..."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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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3면

만일 우리시에「영랑(永郎)학교」가 있다면 그 주요 교재는 한과 리듬이 될 것이다.그동안 한은 우리시에서 극복의 대상으로 인식되었고 또 실제로 극복된 것으로 여겼다.그러나 한의 정서는그 세계관적 기반과 함께 다시 한번 진지하게 검 증되어도 좋을것이다. 한은 이미 알려진대로 절대나 초월의 공간에 도달할 수없는 인간의 한계 때문에 빚어지는 정서다.그 정서에는 도달할 길 없는,그러나 한편으론 쉽게 버릴 수도 없는 이중틀의 마음이내장되어 있다.따라서 거기에는 이중틀 사이를 오가는 반복의 형식이 잠기어 있고 그 탓에 리듬이 생겨나고 노래가 끊임없이 분출한다. 실제로 한이나 한스러움은 노래로 풀어진다.지난날 기층민초들은 좌절과 분노등을 이른바 과학적 세계인식이나 역사적 전망이 없는 자리에서 흔히 노래로 풀어왔다.이성을 근간으로한 근대와 동떨어진 터나 판에서 한은 노랫가락.율동 혹은 예 (藝)나 풍류로 자기표현 방법을 삼은 것이다.「영랑학교」는 바로 이와같은 한의 정서와 노래(리듬)를 교재로 삼아 고도의 상징미학을 가르쳐왔다.그 미학에서는 음상징류의 음악성과 분위기가 두드러진다.하나 보다 두드러진 것은 우리말의 결 과 정감을 갈고 닦는다는 점.이달의 시를 읽으며 필자는 문득「영랑학교」의 이 미덕들을 떠올렸다.신작특집으로 묶인 박태일.서정주씨의 시들에서였다. 우선 박태일씨의 「여항에서」나 「할미꽃」(『現代文學』3월호)은 앞에서 말한 「영랑학교」의 여러 미덕들을 잘 터득한 자리의 작품으로 읽힌다.이를테면 「산 겹겹 물 망망 세월 건너온 기러기는… 백 마리 천 마리 출렁출렁 하늘 밑둥을 옮기는 재기러기 쇠기러기」와 같은 엮음이나 「산 너머 산꽃 재 너머 재꽃」과 같은 묘한 반복으로 만든 리듬,「쥐불자리 쥐불냄새」「늘비늘비 햇살지기」등 우리 말결의 빼어난 되살림이 그것이다.
이른바 90년대에 들어와 우리의 많은 시들이 깜박 잊고 있는것이 하나 있다면 바로 이같은 우리 말결의 아름다움이다.오히려일부 시들은 실험이란 미명아래 잡박스런 상말이나 말의 폭력적 왜곡으로 치닫고 있다.그런데 희한하게 朴■의 시는 우리 말결의어여쁨과 그동안 삶의 알맹이로 가꾸었던 세계를 자기 것으로 만들어 갖고 있다.작품 「여항에서」는 여행시 형태를 빌렸지만 그진술은 「옛길에 떠밀려 새길로 나서는」기러기의 단순 이야기가 아니다.그 기러기의 정황은 요 즈음 새길만을 찾아 정신의 본거지 없이 떠도는 부랑하는 세대의 비극이다.이는 세기말의 도시적삶에 대한 간접 비판으로 읽어도 좋을 터이다.
우리 말결의 완성과 우리네 삶의 알맹이가 무엇인가를 보여주기는 서정주씨의 신작시들의 경우도 마찬가지다.벌써 오래전 독자적인 시학교로까지 불린 徐씨 시의 여러 미덕은 널리 알려져 있다. 노시인의 이달의 시 「산청,함양의 콩꽃」외 4편(『작가세계』봄호)은 사투리시란 부제를 달고 있다.이들 작품의 진술은「~사」「우얄꼬」「~지라우」같은 사투리말투에 크게 기대고 있다.사투리에는 우리 특유의 정서나 율동,그리고 혼이 잠겨 있는 것.
세계화의 구호나 상업성이 판치는 세태에서 한국적인 것들의 현주소로 徐씨는 사투리를 짚고 있는 셈이다.곧 기층 母語인 순수 우리말결을 통해 고유정서를 짜올리는 것이다.특히 그의 시들은 안동소주나 콩꽃같은 것을 통해 우리가 오 래 가꾸어온 삶의 본질들을 넌지시 일러주고 있다.
洪申善〈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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