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와대비서실>168.정호용,이춘구,안무혁,김용갑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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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5면

권력을 쥔 사람은 대권의 후계를 결심했다 하더라도 어느 시점까진 후계자가 누구인지를 절대 발설하지 않는다.후계지명은 곧 권력이동을 의미하기 때문이다.권력을 누구보다 잘 아는 全斗煥대통령도 이점은 철저했다.
그렇지만 권력이동은 권력자의 의사와 관계없이 일어난다.全대통령이 단임을 결심한 그날부터 엄격한 의미에서 권력이양은 시작됐다고도 할수 있다.대통령이 아무리 감추어도 권력이동현상은 측근들에 의해 가장 먼저 감지된다.全대통령의 권력이동 을 재빨리 감지한 그룹은 역시 군출신들이었다.그들은 수십년간 全斗煥과 盧泰愚의 관계를 관찰하고 경험해왔으며,권력의 핵심에 자리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87년 연초 막 참모총장직을 떠나 예편한 鄭鎬溶씨(육사 11기)와 군출신으로 권력핵심부에 자리잡고 있던 李春九민정당사무총장.安武赫국세청장(이상 14기),金容甲청와대민정수석비서관(17기)등은 은밀히 모여 盧泰愚대통령만들기를 다짐했다 .이들은 특별히 주목돼야 할 사람들이었다.이들은 당시 5共 권력의 한가운데 서 있었다.그리고 이들은 盧泰愚대통령만들기를 위해 한발짝씩더 권력의 핵심에 진입해 갔다.마침내 全대통령의 권력을 盧대표에게 넘겨주는 창업공신이 되었다.
간단히 말해 이들은 盧泰愚대통령만들기를 위해 이나라 권부를 전부 나눠맡아 대권획득에 결정적인 공헌을 했다.鄭鎬溶씨는 내무장관과 국방장관을 거치면서 내각과 군부를,李春九총장은 민정당 선거대책본부장이 되어 당을,安武赫청장은 안기부장이 되어 보이지않는 범여권을,金容甲수석은 청와대를 각각 분담해 여권 총동원체제의 기둥역을 해냈다.
이들이 이러한 모의와 역할분담을 통해 실제로 한나라를 통치하는 대권을 만들어냈다는 사실은 당시 우리사회의 현주소를 말해준다.당시 권력의 핵심은 언제나 군출신들이 좌우했다.중요한 의사결정을 대통령이 국무총리나 관계장관의 의견을 물어 결정하는 것보다 군출신동지(물론 이들은 대부분 고위공직에 있었다)나 보안사령관등 현직 군 고위간부들에게 자문을 구하는 것이 자연스러웠던 시절이었다.한마디로「명실상부한 군부정권」시대였던 것이다.
어쨌든 대통령만들기 모의를 끝낸 이들은 盧泰愚대표를 불러냈다.이들은 자신들의 논의내용을 盧대표에게 전달하고 盧대표의 다짐을 받으려 했다.
참석자 A씨의 기억.
『盧대표가 도착하자 모임의 좌장이자 盧대표와 육사.경북고동기인 鄭鎬溶씨가 얘기를 시작했지요.「우리는 盧대표를 다음 후계자로 밀기위해 최선을 다하기로 다짐했소.대신 盧대표는 이자리에서우리에게 몇가지 다짐을 해줘야겠소.」그러자 盧대 표는 뭐든지 말해보라고 했지요.鄭씨가 단도직입적으로 얘기했어요.「全대통령이그런대로 국정을 잘 이끌어왔음에도 친.인척문제 때문에 점수를 잃고 있지않소.盧대표는 대통령이 된후 친.인척문제를 확실히 관리하겠다는 약속을 먼저 해주시오.그 래야만 우리가 나설수 있소」라구요.참석자들은 당시 시중에 퍼지고 있던 全대통령 동생 全敬煥씨의 새마을중앙협의회 관련 비리 실상들에 대한 성토를 벌였지요.드디어 盧대표가 대답을 했지요.
「약속한다.내가 그 약속을 안지키면 내 목에 칼을 들이대도 좋다」는 것이었습니다.盧대표는 매우 강한 표현으로 다짐했지요.
우리는 틈을 주지않고 구체적으로「친.인척중 金復東(처남).琴震鎬(동서).朴哲彦(처고종사촌동생),그리고 盧載愚( 친동생)만 盧대표 자신이 철저히 관리해달라」 고 당부했지요.그러면 나머지친.인척들은 우리가 나서서 철저히 막겠다고 했습니다.』 이날 모임의 결론은 盧대표를 밀되 친.인척 관리를 철저히 하도록 다짐받는 것이었다.
다른 한 관계자 B씨는『당시 대통령직선제가 불가피해지면서 盧대표를 후계로 밀기 위한 모임이 여권 핵심부에서 은밀히 자주 열리곤 했다』고 기억한다.
당시의 정치상황 변화가 이들의 盧泰愚대통령 만들기 행동개시를서두르게 했다는 얘기다.
당시는 金泳三.金大中씨로부터 신민당 운영을 위탁받아 이끌어온李敏雨총재가「7개항 조건부 내각제 수용」구상을 발표하자 실소유주 兩金씨가 당을 형해화시키기로 결정한 때였다.새해 벽두인 1월11일 金泳三 당시 신민당고문은 눈덮인 지리산 을 등반하고 난뒤 『민주화의 대장정에는 낙오자가 있게 마련이다』라는 말로 李敏雨총재와의 오랜 동지적 연대를 끊겠다는 선언을 했다.이는 곧 여당에서 구상해온 내각제 개헌이 물건너갔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당시 청와대관계자 C씨는『張世東안기부장등 여권내 강경파,다시말해 全대통령에 대한 절대 충성파들은 全대통령의 임기후 권력유지를 위해 내각제 개헌을 공작차원에서 진행해왔었다』고 말했다.잘되면 이원집정제식으로 全대통령을 내각제하의 대통 령으로 옹립하는 것이고,못되더라도 내각제는 정치보복을 덜 걱정해도 되기 때문이었다.
C씨의 증언.
『당시 야권의 파트너겸 공식창구는 李敏雨신민당총재였지요.강경파들은 兩金씨를 배제한채 정국을 자신들의 청사진대로 이끌고 갈수 있다고 판단했습니다.반면 온건파들은 兩金씨를 배제한 정치가불가능하다고 확신했으나 全대통령의 절대적 신임을 받던 張부장의정치공작을 중단시킬 수는 없었지요.나도 당시 張부장에게「兩金씨를 뺀 정치는 한달도 못간다」고 말했지만 張부장은 내각제 개헌공작의 성공을 확신하고 있는듯 했습니다.』 李敏雨총재가 조건부개헌을 주장하고 나섰을때 張부장의 공작은 성공하는듯 했다.하지만 兩金씨의 절연선언으로 신민당은 순식간에 공중분해되고 껍데기만 남게됐다.현실은 張부장의 판단이 잘못임을 확인해주었다.당연히 온건파,주로 盧대표를 대 통령후보로 가시화해야한다는 주장의목소리가 높아지는 정치적 배경이 성숙했던 것이다.
***全씨생각 눈치채 군출신 핵심인사들의 盧泰愚대통령 만들기모임은 이같은 정세변화 속에서 대통령제가 불가피해졌을뿐 아니라이에따라 全대통령의 마음도 이미 盧대표를 후계로 삼기로 굳혔다는 나름의 판단이 있었기에 가능했다.또 이같은 모임이 필요했던중요 한 이유는 당시 군출신을 중심으로 盧대표의 대권계승이 확인되면서 걱정들이 생겼기 때문이다.
B씨의 모임에 대한 배경설명.
『全대통령의 리더십에 대해서는 군출신이라면 어느 누구도 의심하지 않을 정도로 확실했습니다.그러나 그런 그도 친.인척 문제만은 어쩔수 없었지요.반대로 군출신이면 누구나 盧대표의 미적지근한 성격을 잘 알았지요.주위의 말을 귀담아듣기도 잘하지만 주위의 얘기에 잘 끌려가기도 하는 그의 성격상 친.인척 문제가 걱정되지 않을수 없었습니다.그래서 盧대표를 후계로 밀자는 회동에서는 항상 盧대표가 대통령이 된 이후 친.인척 문제가 심각할것이라는 걱정들이 많았어요.』 B씨는 이어 친.인척 문제를 심각하게 생각한 이유도 설명했다.
『全대통령의 친.인척비리는 정치와는 무관한 이권개입들이었습니다.다시말해 국정과는 무관한 단편적인 비리들이었지요.하지만 盧대표의 경우 친.인척 문제는 국정과 직결될수 있다는 우려가 많았어요.처남인 金復東의원이 육사 11기 출신으로 적지않은 야망을 가지고 있었고,琴震鎬씨는 바로 한해 전까지 상공부장관을 지냈기에 영향력의 가능성은 심대했지요.또 朴哲彦씨는 당시 안기부장특보로 이미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으며 권력에 대한 야망과 집념이 강했습니다.보다 결정적 인 것은 세상에 알려진 것과는 달리 金玉淑여사의 盧대표에 대한 베갯머리 송사가 李順子여사의 全대통령에 대한 그것보다 훨씬 강했기 때문입니다.』 당시 군출신들은 국정운영의 공동책임자라는 연대의식이 있었다.권력을 함께 창출하고 국정의 요직을 독점했으며 주요정책결정과정에 영향력이 상당했다.
***25面에서 계속 그러나 盧대통령은 대통령이 되고난후 모두 걱정한대로 이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
당시 참석자들은 지금와서 안타까워한다.
대통령이라는 자리가 절대권력으로 받들어지는 우리현실에서 친.
인척 문제는 숙명적인 맹점이었던 것이다.
어쨌든 군출신들은 앞서의 모임에서 알수 있듯 盧후계를 일찍부터 확신했다.
***兩金,李敏雨와 절연 이들은 수십년간 지켜봐온 全.盧씨간의 인간관계로 이를 확신한듯 했다.
나름의 확신에 대해 군출신 한 현역의원의 설명.
『권력의 비정한 생리를 잘 아는 全대통령이 盧대표를 택한 것은 권력을 놓은 이후를 생각해서였지요.盧대표를 가장 믿었다는 것은 다시말해 가장 만만하게 생각했다는 뜻도 되지요.권력을 내놓은 뒤에도 全대통령은 영향력을 가지■자 했기에 퇴임후 자신의요구를 가장 잘 받아줄 대통령으로 盧대표를 택한 것입니다.그러나 퇴임후에도 권력을 가지려했던 것은 全대통령의 순진한 오산이었지요.아무리 믿고 만만해보이는 盧대표라고해도 권력을 나눠가지려고 하지않는 것은 당연한 권력자의 생리입니다.』 다른 한 군장성 출신의 설명.『全대통령은 목에 힘주는 사람이고 盧대표는 귀에 힘주는 사람이라고 하지요.목에 힘주고 얘기하는 사람에게는귀에 힘주고 들어줄줄 아는 사람이 어울립니다.육사11기 중에서全대통령이 盧대표와 가장 친했던 것은 성격탓입니다.
全대통령은 가장 공격적이고 적극적인 성격이었는데 그러한 성격을 가장 잘 받아준 친구가 盧대표였습니다.성격이 비슷해서가 아니라 서로 대조적이기에 더 친했던 것이죠.全대통령은 주색잡기를무척 싫어한 편이었어요.
盧대표도 포커를 하긴 했지만 육사동기중 술이나 노름.여자와 비교적 멀었던 사람중 하나였지요.』 어쨌든 87년부터 盧대표 후계체제는 全대통령의 엄격한 감독하에 단계적으로 가시화됐다.
첫번째 가시화조치는 盧대표의 민정당대표직 연임이었다.
2월 초 盧대표의 임기가 1주일 남짓 남은 어느날 李春九사무총장은 청와대 당무보고중 盧대표의 임기문제를 꺼냈다.
***「만만한 盧씨」 선택 일견 사소한 문제같지만 당시로는 다른 후계가능성이 여전히 회자되던 때이기에 민감한 인사문제가 아닐수 없었다.
만약 全대통령이 다른 후계자를 심중에 두었다면 새로운 당대표를 공개해야할 시점이었다.
그래서 李총장은 가장 중립적인 표현을 사용했다.
『대표임기가 1주일만 있으면 끝납니다.대표는 총재가 임명하는게 당헌이기에 조치가 있어야 되겠습니다.』 全대통령은『어떻게 할까』라고 망설이는 표정을 지었다.이어『문서로 할까,아니면 청와대로 불러 말로 해줄까』라고 말했다.
신임대표를 누구로 할까를 망설인 것이 아니라 재임명 형식을 어떻게 할 것인가를 망설인 것이었다.
盧대표의 후계가능성을 흐리게하고 있던 각종 연막이 확 걷히는순간이었다.
李총장이『아무래도 공식적인 것인만큼 문서로 하는게 좋을듯 합니다』고 청하자 全대통령은 봉황무늬가 새겨진 메모지를 한장 꺼내 오랫동안 품안에 넣고 애용해온 굵은 만년필로 천천히 쓰기 시작했다.
「盧泰愚대표 귀하.
지난 2년간 민정당 대표직을 맡아 업무를 훌륭히 수행해(중략)앞으로도 당의 대표직을 맡아 훌륭히 당무를 수행해주실 것을 간절히 희망합니다.민정당 총재 대통령 全斗煥」 비록 즉석에서 메모지에 썼지만 재신임장의 문구는 정중했으며,글자도 또박또박한정자체였다.
全대통령은 재신임장을 봉투에 넣어 건네주면서『盧대표에게 갖다주고 발표하라고 해』라고 지시했다.
이어 한달 보름뒤 全대통령은 문서에 이어 말로 보다 확실한 盧泰愚후계구도를 공표했다.
3월25일 오후6시 청와대내의 한옥 별관인 常春齋.
全대통령은 민정당 주요 당직자들을 불러 만찬을 하고 있었다.
全대통령은 한창 복잡하던 신민당의 당내사정을 비판한뒤『나는 그 사람들 안만날거요.당의 정치책임자인 盧대표가 다 알아서 하시오』라고 권한위임의 뜻을 밝혔다.
만면에 미소를 머금은 盧대표가『영광스런 자리를 마련해주셔서 감사합니다』라고 인사한뒤 건배를 제의한다.『각하와 더불어 모든영광 나누기를 다짐합니다』『위하여!』 ***「노틀카」들며 可視化 이날 모임은 2시간 가까이 시종 화기애애했다.盧대표는『각하를 통일의 영도자로 모시는 잔』이라며 全대통령에게 술을 권했고,『책임이 무겁습니다.단합해 도와주십시오』라며 참석자들에게 일일이 잔을 권했다.
술은 물론 全대통령의 취향에 따라 양주에 물을 탄 것이라 독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몇순배 돌고 분위기가 무르익자 누군가『노틀카(술잔을 놓아서도 안되고 마신뒤 트림하거나 「카」소리 내서도 안되며 단숨에 잔을 비워야하는 술마시기)한잔 하자』고 제안,전원이 한잔씩 일제히 하는등 상당히 술을 마셨다.
다음날 조간신문은 일제히「盧泰愚대표에게 정국주도권한 위임」이라는 굵직한 1면 톱기사와 함께 「후계구도 가시화」라는 해설기사를 썼다.
〈吳炳祥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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