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권사 부자고객 … 곳간지기(Wealth Management) 가 바뀐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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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호 22면

요즘 부자 동네에선 ‘문어발’이 입소문을 타고 있다. 왠 문어 얘기냐고? 국내 주식·해외 채권·헤지펀드·부동산·원자재 같은 8개 상품에 나눠 투자하는 랩(Wrap) 상품이 20일 등장했기 때문이다. 우리투자증권이 야심작으로 내놓은 옥토(沃土·OCTO)
랩은 8개인 문어발처럼 고객 자산을 곳곳에 최적으로 분산하는 데 초점을 맞췄다.

"이젠 1급 뷔페식으로 드세요"

3조원 넘는 잔액을 자랑하며 랩 시장의 ‘진공청소기’로 통하는 대우증권도 물밑에서 열심히 발 젓기를 하고 있다. 연말께 ‘마스터 포트폴리오’ 시스템을 내놓기 위해서다. 웬만한 부자들마저 펀드에 들 때 유행을 타고 한두 개에 올인할 때가 많다. 이런 ‘패션 투자’의 악순환을 끊고 예컨대 국내 주식형 펀드는 물론 해외 채권, 중국의 성장주와 일본의 배당주 펀드 등으로 몸에 좋은 뷔페 식단을 짜주는 시스템을 공개하겠다는 것이다. 일단 랩에 가입하는 고액 자산가에게만 서비스를 제공할 계획이다.

재테크 시장에서 새로운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르고 있다. ‘상품의 그물망’을 보다 넓고 촘촘히 짜서 서브프라임(비우량 주택담보대출) 사태와 같은 날벼락에 대비하고 수익률을 극대화하는 데 증권사들이 매달리고 있는 것이다. 주식위탁매매의 강자였던 대우증권이 이달 초 강남 타워팰리스 맞은편에 자산관리센터 1호점의 문을 열었고, 서울증권도 얼마 전 PB사업본부를 신설했다.

이런 움직임은 부자를 위한 ‘선진국형 곳간지기’ 서비스라고 부를 만하다. 개별 종목이나 펀드를 골라주고 건건이 수수료를 챙겨온 기존 서비스는 후진국 내지 중진국형이었다는 얘기다. 사실 기존의 랩 상품이나 프라이빗뱅킹(PB)은 토털 자산관리라기보다 주식·펀드·파생상품을 꿰맞춰 제공하는 수준이었다.

이런 미묘한 변화는 수요자와 공급자의 시대적 욕구가 발판이 됐다. 최근 미국에서 날아온 서브프라임 불똥이 단적인 예다. 꼼꼼하고 빈틈없이 재산을 챙겨줄 집사(執事)의 필요성을 절감했을 것이란 얘기다. 우리투자증권 오희열 상무는 “온갖 파생상품과 국경을 넘나드는 자금 이동 때문에 금융시장이 더욱 복잡하고 정신없이 돌아가다 보니 나홀로 감당하긴 어렵게 됐다”며 “앞으로 자산관리 성패는 전문가와 어떻게 연합전선을 구축하느냐에 달려 있다”고 말했다. 2009년부터 시행될 자본시장통합법도 이런 시류에 군불을 때고 있다. 온갖 맞춤형 상품을 만들어 고객들의 욕구에 탄력적으로 대응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 정부가 과다한 펀드 판매보수를 낮추려 하는 만큼 증권사들은 새 수익원을 찾아야 할 다급한 처지다.

사실 은행을 중심으로 ‘금융업의 꽃’이라는 PB가 등장한 지 10년이 지났지만 선진국엔 못 미쳐 어떤 식으로든 변화가 예고돼 왔다. 대우증권 이제성 상무는 “미국의 자산관리는 대차대조표상의 부채관리까지 포괄하는 개념”이라고 했다. 증권사들이 개인의 재산뿐 아니라 빚까지 관리해 준다는 얘기다. 벤처 붐 이후로는 신흥 부자들을 위해 소유 회사의 자산·부채까지 관리해 준다는 것이다. “그러려면 주식은 물론 세무·부동산까지 지원 시스템이 굉장히 잘 받쳐줘야 하는데 우리는 아직 이 단계엔 가지 못하고 있다”고 이 상무는 설명했다. 그들의 수준을 따라가겠다는 각오지만, 물론 쉽지 않은 길이다.

그렇다면 부자를 포섭하기 위한 증권사들의 전략은 무엇일까. 이제성 상무는 “자산관리의 질은 상품이 좌우한다”고 했다. 대우증권은 장외파생상품이나 환매조건부채권(RP) 등이 강하다고 했다. 인력도 내세웠다. 펀드는 운용사가 잘 굴리지만 전체 직원이 30~100명 수준이다. 반면 대우증권은 리서치 인력만 100명이라는 것이다. 또 1000명의 주식위탁매매 직원 중에서 실력을 검증받은 ‘선수’들만 뽑아 자산관리 창구에 앉힌다고 했다.

우리투자증권 유희열 상무는 “‘전투원·실탄·무기 등을 3대 축으로 삼아 고지 정복을 노리겠다”고 말했다. 전투원은 자산관리 전문요원, 실탄은 각양각색의 투자상품, 무기는 서비스 통합시스템이다. 직원 역량에 대해 그는 “뺑뺑이를 돌려 약정 수수료를 올리는 걸 직원들 스스로 꺼리는 것만 봐도 수준이 많이 높아졌다”고 했다. 고객에게 최적의 상품 조합을 제시할 무기인 통합시스템은 기존 고객 데이터베이스(DB)에 상품 추천·운용 성과 등 세 가지를 합쳐 내년 여름께 선보일 예정이다. 그는 “앞으로 3억원 이상의 자산가는 오프라인 서비스를 강화할 것”이라며 “대중 고객은 온라인이나 콜센터로 연결되는 체계로 갈 것”이라고 했다. 차별화된 서비스를 돈 많은 자산가들에게 집중하겠다는 것이다.

한국투자증권 박미경 상무는 “그림자처럼 나를 대신할 전문가를 찾는 시대가 됐다”며 “3년 전 원유값이 치솟았을 때 미국 씨티은행을 방문했는데 고객들에게 이미 원유 상품에 투자토록 한 걸 보고 깜짝 놀랐다”고 했다.

그는 “최적 자산배분을 위해 주식·채권·펀드의 전체 수익률을 파악해 직원을 평가하는 시스템을 지난해 말 이미 구축했다”며 “이에 더해 늘 먹는 밥·반찬 대신 특식도 마련하고 있다”고 했다. 이를테면 30명 정도의 부자를 모아 100억원 규모로 사모펀드를 만들어 굴리는데, 총규모가 1000억원에 이른다는 것이다. 최근 내놓은 ‘미술품 펀드’가 대표적인 예다.

다만 수수료에 인색한 투자문화는 걸림돌이다. 한국에선 뭐든지 ‘공짜 서비스’에 익숙하다. 돌아오는 떡고물이 없으니 증권사들도 부가가치를 얹으려는 노력이 모자랐다. 우리투자증권 오희열 상무는 “한국은 거래할 때마다 수수료를 받지만, 선진국은 자산의 파이로 수수료를 뗀다”고 했다. 예컨대 유럽에선 1억원을 맡기면 이 돈을 굴려주고 해마다 몇%씩 정기적으로 받는 체계라는 것이다. 거래에 기반한 수수료 체제 아래선 아무래도 증권사들이 상품을 자주 사고 팔도록 유도하기 쉽고, 이에 따라 고객들은 손실을 입을 가능성이 크다. 이제성 상무는 “지금까진 매매를 많이 하는 고객이 ‘왕’이었지만, 앞으론 자산 덩치를 보고 고객 등급을 정하게 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증권사의 새 곳간지기 서비스는 앞으로도 봇물을 이룰 것이다. 어떤 회사, 어떤 서비스를 선택할지 부자들의 고민도 늘 수밖에 없다. 아직 임상시험 단계인 만큼 일단은 자기 회사에 대한 자랑이 앞선다. 박미경 상무는 “투자은행(IB)과 자산관리(AM) 양대 축이 튼튼한 회사를 골라야 한다”고 했다. IB는 상품을 공급하는 공장, AM은 고객을 만나는 판매점이라는 것이다. 이제성 상무는 “자산관리 직원의 매크로(거시경제) 분석까지 듣고 실력을 평가해야 하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오희열 상무는 “회사 브랜드도 중요하다”며 “은행과 연계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는 금융그룹 내 증권사가 경쟁력이 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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