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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나테 홍 "남편 원망한 적 없어 … 시대적 운명일 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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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북한으로 돌아간 독일 유학생 남편 홍옥근씨를 46년간 그리워하며 살아 온 레나테 홍 할머니가 23일 서울 한국프레스센터 외신기자클럽에서 회견을 열었다. 1961년 4월 북한으로 돌아간 홍옥근씨가 그해 말 편지와 함께 보내온 연꽃잎. 레나테 홍 할머니는 46년간 소중히 간직해 왔다. 아래 사진은 레나테 홍 할머니가 남편, 큰아들 현철 페터씨와 61년에 찍은 사진을 설명하고 있다. [사진=최승식 기자]

"남편이 독일로 오는 것이 불가능하다면 북한으로 가는 길을 마다하지 않겠습니다. 김정일 위원장님의 지원을 기대할 수 있을는지요."

46년 전 생이별한 북한 유학생 출신 남편(본지 2006년 11월 14일자 1면)을 기다려온 레나테 홍(70) 할머니의 목소리가 떨렸다. 23일 방한 사흘째를 맞은 그는 국내외 보도진과 기자회견을 하고 남북한 정상에게 보내는 편지 형식의 탄원서 2통을 이날 공개했다. 그는 김정일 국방위원장에게 보내는 글에서 "아마도 불가능한 것도 가능하게 만드는 외교적 방법이 있지 않겠느냐"며 "부디 (가족상봉을) 도와 달라"고 간청했다.

레나테 할머니는 "헤어질 때 작별이 지금까지 계속될지 예상하지 못했다"며 "남편을 다시 한 번 보고 싶다는 열망은 더욱 커가고 있다"고 김 위원장에게 하소연했다.

그는 또 "10월 2일 열릴 남북 정상회담에서 나와 같은 독일 이산가족의 고통을 덜어 주셨으면 한다"고 호소했다.

이날 오후 레나테 할머니는 청와대를 방문해 자신의 탄원서를 노무현 대통령과 김정일 위원장에게 전달해 줄 것을 부탁했다.

앞서 레나테 할머니의 기자회견에는 국내외 보도진이 대거 몰려 들었다. AP.AFP.로이터.dpa.블룸버그.교도 등 유력 통신사와 국내 지상파 방송 3사 등이 열띤 취재 경쟁을 벌였다. 뉴욕 타임스가 발행하는 인터내셔널 헤럴드 트리뷴(IHT)은 이날 레나테 할머니의 사연을 종합 2면에 '독일 여성이 한국에서 자신의 러브스토리가 결실을 보길 바라고 있다'는 제목의 머리기사로 비중 있게 다뤘다. 또 독일 공영 방송인 ZDF는 독일에서 전화를 걸어와 할머니와 인터뷰를 생방송으로 전했고 영국 런던의 BBC 본사와 미국 워싱턴의 VOA에서도 인터뷰 요청을 해 왔다.

다음은 일문일답.

-남편과 헤어질 때 어떤 기분이었나.

"당시 생후 10개월 된 큰아들을 안고 예나 기차역에 배웅을 나갔다. 아들이 두 팔을 벌리고 '아빠' 비슷한 말을 했다. 그의 눈과 얼굴을 봤다. 눈물로 얼룩진 모습. 늘 쾌활하고 강하던 남편의 그런 모습은 한번도 본 적이 없다. 그게 기억의 전부다."

-가족을 떠나간 남편을 원망한 적은 없었나.

"당시의 정치적인 상황 때문에 귀국한 것이다. 지난 46년간 남편과 헤어지게 됐지만 북한 당국을 비롯해 그 누구도 원망해 본 적이 없다. 시대적인 운명이었다."

-남편을 만나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해왔나.

"헤어진 뒤 동독 외무부와 북한 대사관을 통해 상봉을 시도했다. 그러나 당시 국가재건이 시급한 북한에서는 남편처럼 외국에서 유학한 인재를 돌려 보낼 수 없다는 대답을 해왔다. 동독 당국도 더 도와줄 수 없다고 했다. 혼자 직장 다니며 두 아들을 키우기가 너무 힘들어 그 이후는 거의 포기하고 살았다. 그러나 한국의 이산가족 상봉 소식을 전해 듣고 나도 가능하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가지게 됐다."

-북한의 남편은 재혼했다는데 만일 상봉하게 되면 향후 계획은.

"새로 가정을 꾸린 남편을 곤란하게 하고 싶지는 않다. 그러나 나도 남편도 70대 노인이다. 나야 다른 욕심을 부릴 수 없지만 남편은 두 아들과 얼굴은 한 번 봐야 하지 않겠나. 남편 역시 우리를 한번은 보고 싶어할 것이라고 확신한다."

-남편이 떠나기 전 이별할 수 있다는 말을 한 적은 있나.

"전혀 없었다. 공부가 끝나면 우리 가족 모두 북한에 가서 살 것이라는 계획을 세웠었다. 특히 아들에 대한 남편의 사랑은 지극했다. 첫 아들 현철이 태어나자 남편은 아들을 팔에 안고 내려 놓으려고 하질 않았다. 내가 애를 재워야 한다고 해도 그저 늘 안고 있었다."

-앞으로의 계획은.

"가족상봉은 인도주의 문제다. 독일이나 한국이라는 국경을 떠나 이산가족 상봉 문제가 해결될 수 있도록 열심히 투쟁하겠다."

유권하 기자

김정일 위원장에게 보내는 탄원서

존경하는 위원장님. 제게는 매우 절실한 문제를 알려 드리기 위해 용기를 냈습니다.

1952~61년 조선 민주주의 인민공화국(북한)은 많은 젊은이들을 동독으로 유학 보냈습니다. 북한 젊은 남성들 가운데 일부는 동독에서 여자친구를 사귀고 결혼했으며 아이를 낳았습니다.

저에게도 역시 북한에서 온 한 대학생이 저의 운명이 됐습니다. 그의 이름은 홍옥근이었고 예나에서 화학을 공부했습니다. 우리들은 60년 2월에 결혼, 6월 첫 아들이 태어났습니다. 61년 8월에는 둘째 아들이 출생했습니다. 홍옥근은 60년 대학을 졸업해 동독의 한 회사에서 실습생으로 일할 예정이었습니다. 61년 4월 그는 즉시 고국으로 돌아오라는 소환령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헤어질 때 작별이 지금까지 계속될지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저는 재혼을 하지 않았고 두 아들 현철 페터와 우베를 키우며 예나에서 혼자 살아 왔습니다.

오랜 세월 저는 가족이 모여 함께 사는 미래를 희망해 왔습니다. 그러나 언젠가부터 이러한 바람이 헛된 것일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그러는 사이 저는 70세 노인이 되었고 남편을 다시 한번 보고 싶다는 열망은 더욱 커가고 있습니다. 특히 저는 그동안 성장한 두 아들이 아버지를 만나 볼 기회를 갖게 되길 바랍니다.

남편이 독일로 오는 것이 불가능하다면 저는 그를 만나기 위해 북한으로 가는 길을 마다하지 않겠습니다. 위원장님의 지원을 기대할 수 있을는지요? 아마도 불가능한 것도 가능하게 만드는 외교적 방법이 있지 않겠습니까? 부디 도와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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