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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찬호에게 응원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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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한때 미국 메이저리그 중계가 국내 TV 시청자들의 눈길을 사로잡은 적이 있다. 외환위기로 온 국민이 힘들어 하던 1999년 전후다. LA다저스 유니폼을 입고 힘차게 공을 뿌려대는 박찬호 선수의 모습에서 국민들은 큰 용기와 위안을 받았다. 97년 14승, 98년 15승, 99년 13승, 2000년 18승, 2001년 15승. 지금 돌아봐도 대단한 승수다. 1승씩을 추가할 때마다 국민들은 뿌듯해했고, 잘 던지고도 패전을 기록할 때면 내 일인 양 아쉬워 했다.

그런 박찬호가 메이저리그에서 멀어지고 있다. 2003년부터 하향곡선을 그리더니 올 시즌엔 마이너리그에서도 난타당하고 있다. 휴스턴 산하 트리플A 라운드록 익스프레스에서 뛰고 있는 박찬호는 22일(한국시간) 시즌 13패(6승)째를 당했다. 지난달 15일 이후 6연패 수렁이다.

며칠 전 박찬호는 국내 한 지인에게 전화를 걸어 “요즘 컨디션도 괜찮고 공도 좋은데 자꾸 맞는다. 한 방 맞으면 아무 생각이 나지 않고 그러다 연타를 허용한다”며 답답해했다고 한다. 그러면서 “전성기 때의 폼을 찾아가는 과정이니까 점차 좋아질 것”이란 기대감을 나타냈다고 한다. 박찬호가 시즌 초 마이너리그로 내려가면서 서재응·최희섭·김병현도 뒤를 따랐다. 한국인 메이저리거 전멸의 상황이다.

그럼 박찬호가 다시 메이저리그에서 뛰는 모습을 볼 수는 없을까. 불 같은 강속구로 시름에 잠긴 국민들 가슴에 희망과 자신감을 불어넣던 전성기의 모습으로 돌아갈 수는 없을까. 선수로는 농익은 34세란 나이, 착실한 몸 관리와 훈련으로 제2의 전성기를 구가할 여지는 아직도 많다고 야구인들은 말한다.

그러기 위해선 정신적으로 더 강해져야 한다는 주문이다. TV로 박찬호의 피칭 모습을 본 사람은 눈치 챘겠지만 박찬호는 무척 내성적이다. 중학교 때는 야구부장에게서 “배짱이 없다”는 소리를 듣고 담력을 키우기 위해 여자친구를 사귀려 했을 정도다. 여자친구 사귀는 일이 담력을 필요로 할 만큼 힘든 일이었다는 점도 재미있지만 이마저도 떨려서 제대로 말 한마디 붙이지 못하고 실패했다고 한다. 편지를 보내 초등학교 여자 동창을 만나기로 한 전날, 하도 긴장이 돼 밤잠을 설쳤고, 막상 약속 장소로 나온 그녀를 보자 등에 식은 땀이 흐르고 얼굴이 홍당무가 돼 입이 얼어붙었다고 회고했다. 그래서 ‘야간 공동묘지 훈련’으로 담력 훈련 방법을 변경했으나 누군가 목덜미를 잡아당기는 느낌이 들어 ‘걸음아 나 살려라’며 집으로 도망 왔다고 했다. 얼마나 놀랐는지 공동묘지 어디쯤을 달리는 줄 알았는데 뭔가 앞을 가로막아서 보니까 자기 집 대문이더라는 것이다.

운동선수에게 배짱은 필수 덕목이다. 배짱이 있어야 긴장을 덜 하게 되고, 근육이 편하게 이완돼 제 기량이 나오는 법이다.

남자 100m 한국기록은 18년째 요지부동이다. 오죽하면 육상연맹이 신기록 세우는 선수에게 1억원의 포상금을 내걸었을까. 이를 깰 유력한 후보로 꼽히는 선수가 임희남(23)이다. 연습 때는 가끔 한국기록을 깬다고 한다. 그러나 막상 경기에선 몸이 위축돼 제 기록이 나오지 않는다고 했다. 얼마 전 최경주도 한 인터뷰에서 비슷한 말을 했다. 승부처에서는 극도의 긴장감으로 백스윙이 제대로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백스윙이 10㎝ 덜 되면 거리는 10야드 이상 줄고 방향도 부정확해진다”고 실토한 적이 있다. 그래서 ‘실전은 연습처럼’이라는 말이 있는지도 모르겠다.

이쯤에선 우리 국민들이 박찬호에게 아낌없는 성원을 보내 주면 어떨까. 가족이 있는 LA 집을 떠나 라운드록에 혼자 기거하며 메이저리그 재진입의 기회를 노리고 있는 그에게 “파이팅”을 외쳐 주자. 외환위기 때 그에게서 받은 위로를 이젠 되돌려 줄 때가 됐다.

신동재 문화스포츠부문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