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8일 경선 드라마' 10대 장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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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나라당 대선 후보 경선 투표를 이틀 앞둔 17일 마지막 합동연설회가 서울 잠실실내체육관에서 열렸다. 1만5000여 명의 당원이 연설회장을 가득 메운 채 후보자의 연설을 듣고 있다. [연합뉴스]


D-1. 박근혜 후보가 지난해 6월16일 당 대표직을 내놓으면서 시작된 한나라당 경선전 '428일 전쟁'이 18일로 하루를 남겨 두고 있다.

판세가 요동치고, 고비와 반전이 거듭됐던 428일 드라마의 10대 장면을 돌아봤다. 이 장면들은 19일 경선 투표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현재진행형인 사건이다.

① 2006년 7월 11일 전당대회=이명박 후보와 박근혜 후보의 대리전이었다. 첫 대결은 박 후보의 완승이었다. 당 대표 경선에서 박 후보를 등에 업은 강재섭 대표가 이 후보가 민 이재오 최고위원을 제치고 선출됐다. 이 후보는 개표 결과가 발표되기 전에 대회장을 떴다. 이 후보는 부인 김윤옥씨와 통화하며 "전화위복이 될 것"이라며 입술을 깨물었다고 한다.

② 추석 연휴와 북한 핵실험=열세를 확인한 이 후보가 먼저 치고 나왔다.

한반도 대운하 탐사를 시작으로 8월부터 표밭에 뛰어들었다. 박 후보보다 2개월 빨랐다. 추석 연휴를 넘기며 여론조사에서 이 후보는 박 후보를 따라잡기 시작했다. 10월 9일 북한 핵실험을 계기로 여론조사는 이 후보의 1위로 뒤집혔다.

③ 네거티브 불 붙인 정인봉.김유찬="대통령이란 자리는 워낙 막중하기 때문에 대선 후보는 당연히 검증해야 한다."

1월 3일 박 후보의 한 마디는 기나긴 '검증 여정'의 출발을 알렸다. 2월 정인봉 전 의원과 김유찬씨의 폭로로 시작된 검증전은 '박근혜 공세→이명박 방어'의 구조를 고착화했다. 한때 50%를 넘었던 이 후보의 지지율은 네거티브전이 확산되면서 떨어지기 시작했다.

④ 경선룰 전쟁='6월이냐, 9월이냐' '4만이냐, 40만이냐''여론조사는 어떻게 반영하나'

경선 시기와 선거인단 규모, 여론조사 반영 방식을 둘러싸고 이.박 후보는 갈등했다. 2007년 5월 박 후보는 여론조사 논란이 커지자 "1000표를 더 얹어드릴테니 원래대로 하자"고 말했고 이 후보는 양보했다.

⑤ 고건의 불출마와 손학규 탈당=1월 고건 전 총리의 중도 하차, 3월 당 내 '빅3'였던 손학규 전 경기지사의 탈당은 경선의 구도를 바꿨다. 손 전지사의 탈당엔 "어차피 나가봐야 시베리아"란 이 후보의 말이 촉매제 역할을 했다.

⑥ 4.25 재.보선 패배와 당 붕괴 위기=재.보선 참패는 '선거의 여왕'으로 불리던 박 후보에게 상대적으로 더 큰 충격이었다. 박 후보는 "군대를 동원해 행정도시를 막겠다는 사람과 공동 유세하면 표가 더 떨어졌을 것"이라고 이 후보를 정면공격했다. 박 후보는 자연스럽게 책임론에서 빠져 나왔다.

⑦ 도곡동 땅=이 후보 처남 김재정씨의 '전국 부동산 소유' 관련 보도는 경선을 '부동산 경선전'으로 바꿨다. 이후 박 후보 측 서청원 상임고문은 "이 후보가 도곡동 땅을 내 땅이라고 한 적이 있다"고 주장하면서 도곡동 땅 논란은 진실게임으로 번졌다.

⑧ 검찰을 초대하다=7월 4일 이 후보 처남 김씨는 박 후보 측 인사를 검찰에 고소했다. 훗날 "외세를 경선전에 끌어들였다"(강 대표)는 비난을 받은 대목이다.

검찰은 공안부가 아닌 특수부에 배당해 이 후보 측을 긴장시켰다.

8월 13일 '도곡동 땅 중 이 후보의 친형 상은씨 지분은 차명 재산으로 보인다'는 모호한 수사 발표는 경선의 최대 마지막 변수로 작용하고 있다.

⑨ 대운하 보고서와 국정원 공방=지지율 하락 국면에서 이 후보 측을 지탱한 변수들이었다. 정부기관이 만든 한반도 대운하 보고서와 국정원 직원의 이명박 자료 열람 파문이 일자 이 후보 측은 "정권의 이명박 죽이기"라고 반격했다.

⑩ 탈레반 인질 사태, 남북 정상회담=8월에 터진 대형 이슈들은 다른 검증 이슈의 파괴력을 줄였다. 추격전에 한창이던 박 후보에겐 악재였다.

서승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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