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에디터칼럼

웃통 벗고 힘자랑하는 대통령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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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여간 몸이 좋지 않고는 50대 중반의 남자가 대중 앞에서 웃통을 벗어젖히기란 쉽지 않다. 그것도 여느 사람이 아니라 한 나라의 대통령이면 더욱 그렇다. 그런데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13일 그런 파격을 보였다. 몽골과 맞닿은 예니세이강 상류에서 웃통 벗고 낚시하는 모습(사진)이었다. 파파라치가 몰래 촬영한 사진이 아니라 크렘린 공보실이 찍어 AP와 AFP통신을 통해 전 세계에 뿌린 것이다.

푸틴의 몸은 건강미가 넘쳤다. 그는 유도와 러시아 격투기인 삼보 유단자다. 스키도 수준급이며 요즘도 매일 1㎞씩 수영을 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의 이날 낚시 이벤트는 평창 주민들의 아쉬움을 다시 한번 일깨우기도 했다. 2014년 소치 겨울올림픽 유치에 큰 도움을 준 알베르 2세(모나코 대공)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위원을 옛 제정 러시아 황제 별장으로 초대했던 것이다. 소치가 승리한 직후 AFP는 러시아가 이번 유치전에 쓴 돈을 6000만 유로(약 750억원)로 추산했다. 이런 뉴스와 소문을 정보기관 수장 출신인 푸틴이 몰랐을 리 없다. 하지만 그는 그런 소문 따윈 전혀 개의치 않는 듯 보였다.

근육질 몸매 과시와 함께 그는 요즘 연일 힘자랑을 하고 있다. 8일엔 가상의 핵폭탄을 장착한 폭격기를 미군기지가 있는 태평양의 괌 인근까지 출격시키는 훈련을 했다. 1991년 소련 붕괴 후 처음 있는 일이었다. 이날 러시아 공군은 모두 30대의 전투기를 한꺼번에 태평양과 대서양, 그리고 북극해 상공으로 날려보냈다.

  그 전날 러시아 해군은 태평양의 핵잠수함에서 탄도미사일 ‘시네바’를 발사하는 실험을 했다. 최대 10개의 핵탄두를 실을 수 있는 시네바는 8300㎞를 날아가 목표를 명중시켰다. 다시 그 하루 전엔 전투기는 물론 탄도미사일까지 요격할 수 있는 신형 방공미사일 S-400 부대를 모스크바 인근에 첫 배치했다. 6월 말에는 사거리 1만㎞의 미사일 ‘불라바’ 발사 실험에 성공했다. 러시아 서북단 백해(白海)에서 쏜 미사일이 극동 캄차카 반도의 목표물을 박살냈다. 일련의 무력 시위는 동유럽에 미사일 방어(MD) 기지 건설을 강행하는 조지 W 부시 미국 행정부에 대한 경고를 담고 있다.

러시아 탐사팀은 이달 초 잠수정 두 척을 세계 최초로 북극해 바닥으로 내려보냈다. 그리고 거기에 티타늄으로 만든 러시아 국기를 꽂았다. 수심이 4300m에 이르는 이곳도 자국 소유라고 주장하는 정치적 행위였다.

지난달 말 러시아 일간지 네자비시마야 가제타가 여론조사 기관인 ‘아펙’에 의뢰해 조사한 결과 러시아를 이끌 정치인 100명 중 1위는 단연 푸틴(10점 만점에 9.87점)이었다. 겨울올림픽 유치 후 실시된 한 여론조사에서 그의 지지율은 무려 83%에 달했다. 그러니 임기를 겨우 8개월 남겨놓고 있지만 레임덕 현상은 찾아보기 힘들다.

 푸틴은 지난해 5월 10일 연례 국정연설에서 “러시아는 외국의 압박에 맞설 준비가 돼 있어야 한다”며 “군비경쟁의 종말을 얘기하는 것은 시기상조”라고 역설했다. 미국에 비하면 러시아 국방비는 별것 아니라며 군사력 강화에 적극 나설 것임을 대내외에 선언한 것이다.

푸틴의 힘은 천연가스와 석유에서 나온다. 오일 머니가 넘치다 보니 경제도 살아났다. 그는 이란같이 미국이 싫어하는 나라들과 가까이 지내기도 주저하지 않는다. 부시 대통령도 그를 무척 신경쓰고 있다. 푸틴은 겨울올림픽 유치를 위해 과테말라로 가던 길에 잠깐 시간을 내 부시 대통령을 만나줬다. 푸틴은 혼자였지만 부시 대통령은 부인 로라는 물론 아버지 부시 전 대통령과 어머니도 불러 그를 환대했다. 장소는 한 번도 외국 정상을 초대한 적이 없던 메인주의 부시 집안 별장이었다. 이렇게 예를 갖춰 초청했지만 부시의 MD 정책과 관련해 푸틴은 할 말을 다 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국제무대는 힘의 무대다. 힘은 경제력에서 나온다. 목소리 큰놈이 이기는 곳이 아니다. 그래서 다들 경제, 경제 한다. 경제력이 뒷받침되지 않은 상태에서 목소리만 높여봤자 아무도 듣지 않는다. 지난 5년간 노무현 대통령을 포함한 우리가 그렇게 살지 않았는지 돌아볼 일이다.

심상복 국제담당 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