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년대 양심 일깨운 「전사시인」/어제 타계한 김남주씨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22면

◎옥고 10년… 독방벽에 「혈시」도
『바람의 손이 구름의 장막을 헤치니/거기에 거기에 숨겨 둔 별이 있고//시인의 칼이 허위의 장막을 헤치니/거기에 거기에 피묻은 진실이 있고//없어라 하늘과 땅 사이에/별보다 진실보다 아름다운 것은.』
13일 타계한 김남주씨가 80년대를 온통 감옥에서 보내며 쓴 2백여편의 시중 한편인 「하늘과 땅 사이에」다.
0.7평짜리 독방에서 손톱을 깨물어 하얀 벽에 피로 시를 쓰고 방바닥에 못을 갈아 갱지나 담뱃갑에 시를 쓴 그는 탄압받는 저항시인으로 국내는 물론 세계의 주목을 끌었다.
구름과 허위의 장막을 헤치고 쓴 별같은 이상세계와 현실의 진실을 향한 시는 감옥 밖으로 나와 80년대 폭압에 얼어붙은 양심을 깨웠다. 칼을 갈아 피로 쓴 김씨의 시작법은 80년대 저항시의 전범이 되어 민중시의 도도한 흐름을 이루게 했다.
68년 전남대에 입학하면서부터 반독재 민주화투쟁에 앞장선 김씨는 73년 투옥돼 8개월만에 풀려났다. 고향에서 농민운동·문화운동 등을 펼치던 김씨는 78년 남조선민족해방전선에 가입,「전사」로 활동하던중 79년 체포돼 88년까지 9년3개월을 영어의 몸으로 지냈다.
89년 뒤늦게 결혼,아들까지 둔 편안한 삶으로 혹탄탄한 긴장에 의해 지탱되는 정신의 순결성이 해이해지지 않을까 경계하며 시대의 남은 어둠과 시라는 무기로 싸우던 「전사시인」이 병마에 무릎을 끓은 것이다.
감옥에서 나올때 김씨는 상처 자국으로 이미 벌집이 된 몸과 검은 안색이었다. 체포될 당시 60여일간의 고문수사와 장기 독방수감에서 야기된 병이 김씨와 그의 시를 앗아간 것이다.
더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대책없이 순정한 인간애의 시를 장총처럼 메고 이제 김씨는 설원으로 떠났다.<이경철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