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법원을 대법원답게 만들려면…/서정우(시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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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상고여과」로 시간낭비 없애자/업무량 폭주로 판결의 질 저하실정/정상운영 위해 주요사건 전념토록
최근 대법원의 사법제도발전위원회가 전반적인 사법제도의 개선방향을 모색하는 과정에서 상고제도의 개선방안으로 남상고·무익한 상고를 여과하는 장치를 도입하는 문제가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다고 한다. 필자는 판사로 재직할 당시 대법원의 수석재판연구관으로 약 2년6개월을 근무한바 있다. 그 당시 무익하고 남용적인 상고의 범람으로 인한 폐단을 누구보다도 뼈저리게 느껴 오면서 남상고·무익한 상고에 대한 여과장치를 마련할 필요성을 느껴왔기 때문에 이에 대한 의견을 밝혀 이 문제에 관한 이해를 돕고자 한다.
어느 나라에서든지 최고법원은 구체적인 개개사건의 승패를 가려주는 것을 그 임무로 하는 곳이 아니라 한 나라의 최고 법선언기관으로서 법해석을 통일하고 그 나라가 지향해야 할 법률문화를 선도해 나가야 하는 기관이다. 최고법원의 판결은 당해사건의 해결책으로서의 기능만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시대의 법철학이 나타나 있어야 하고 앞으로 파생될 관련 사건들에 대하여도 훌륭한 길잡이가 되어 국민들의 법생활에 지침이 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므로 최고법원은 법이론상의 문제점만을 쟁점으로 하여(법률심) 대법관 전원의 충분한 토론을 거친후에 대법관들의 가치관·인생관이 투영된 최고의 법이론을 선포하는 일을 그 업무의 중심으로 삼아야 한다. 영국이나 미국의 최고법원 판결을 읽으면서 그 판결에 나타난 심오한 법철학에 감탄하고,독일 최고법원의 상세한 법이론에 탄복하면서 우리 대법원도 이러한 판결들을 쓸 수 있게 되는 날이 오기를 간절히 바라는 것은 비단 필자만의 소망은 아닐 것이다. 이런 나라들의 최고법원 판결이 훌륭한 것은 그 나라의 대법관들이 우리 대법관들에 비하여 특히 우수해서가 아니라,적벌하게 남상고를 여과하여 쓸데없는 시간을 낭비하지 않고 중요한 사건에 정력을 집중하게 해주는 제도적 배려가 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의 형편은 어떤가. 상고사건은 급격하게 증가하는 추세로 93년도 통계로는 대법관 12인이 매월 1천2백건의 사건을 처리하여야 겨우 현상유지를 할 수 있는 형편이라고 한다. 수백쪽에서 수천쪽에 이르는 소송기록을 자세히 보고 관련 판례와 내·외국의 자료를 수집 검토한후 잘못되지 않은 최선의 판단을 해야하는 대법원 업무의 성격을 생각하여 보면 이러한 업무량은 한마디로 불가사의라고 할 것이다. 이러한 과도한 업무량 때문에 우리 대법원 판결은 지나치게 간략하고 당해 사건의 결론을 내기에 바빠 매우 피상적인 이론만 설시함에 그치고 있어 외국 최고법원의 판결에 비해 빈약하다는 비난을 받아왔다. 심지어 「판례의 충돌」이라는 대법원이 절대로 해서는 안되는 실수까지 가끔 발생하게 된다. 아무리 훌륭한 법관이라도 그 능력에는 물리적 한계가 있게 마련이므로 도저히 처리할 수 없는 업무량을 감당하면서 모든 사건에서 제대로 된 판결을 할 수 있기를 기대할 수는 없다. 현재와 같은 업무량의 증가추세로 나갈 때 남상고를 적절하게 여과해주지 않는다면 앞으로 우리 대법원 판결의 질이 어떠하리라는 것은 불을 보듯 명확하다. 이러한 판에 어떻게 좋은 판결을 바랄 수 있으며 대법원이 실수한다고 비난할 수 있겠는가. 이를 개선하는 길은 우리도 외국의 예를 본받아 남상고를 철저히 여과하는 방안 외에는 없다고 생각된다. 남상고 여과장치는 단순히 대법관들의 일을 편하게 하기 위해 업무량을 줄이겠다는 차원에서 논의되는 제도가 아니라 현재와 같은 상고제도를 유지하는 한 업무량의 폭주로 인해 대법원의 정상적인 운영이 불가능하다는 위기의식을 계기로 대법원의 본질적인 기능을 원칙대로 회복시키기 위해 마련된 것이다.
반대하는 이들은 이러한 남상고 여과장치가 하급심에서 패소한 국민들에게 시정을 받을 기회를 박탈하여 헌법상의 「재판을 받을 권리」를 제한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상고권은 우리 헌법상의 권리가 아니며 세계 중요 사법선진국들도 모두 남상고를 여과하는 제도를 택하고 있고 어느 나라도 상고할 수 있는 권리를 헌법상으로 보장하고 있지 않다. 대법원의 판결결과 전체의 1할에도 못미치는 사건만이 하급심의 판결을 파기하고 있다는 통계에 비추어 볼 때 쓸데없는 상고를 무제한 용인하는 것은 오히려 하급심에서 승소한 국민들의 권리실현을 까닭없이 지연시키는 폐단을 낳을 뿐이라고 할 것이다.
이 시대 최고의 법관 13명으로 구성된 대법원으로 하여금 쓸데없는 업무에 대부분의 시간을 뺏기게 하여 정작 중요한 사건을 제대로 다룰 수 없게 한다면 우리나라의 법률문화 발전은 기대할 수 없다. 대법원을 대법원답게 만드는 일이 하급심에서 패소한 당사자들의 『막판까지 가보자』는 한풀이를 달래주는 일보다는 훨씬 중요한 것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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