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각장애인 게이머, '게임황제' 임요환과 명승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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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민석 군

▶임요환 선수

“아쉽지만 후회는 없어요” (이민석 군)
“경기내내 말이 안된다고 생각했어요. 보면서 하는게 아닌지, 꼭 농락당하는 기분같았어요” (임요환 선수)

임요환선수는 도저히 믿기지 않는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래 흔들었고 이민석 군은 TV로만 듣고 동경하던 임요환의 목소리를 듣고 믿기지 않는다며 웃기만 했다. 그렇게 두사람은 경기 후 대기실에서 서로의 손을 꼭 잡고 서로를 치켜세우고 있었다.

앞을 전혀 보지 못하는 시각장애를 극복하고 스타크래프트(스타크)를 능수능란하게 컨트롤하는 이민석(16. 서울맹학교 2년)군.

李군은 17일 서울 코엑스에서 벌어진 게임행사에 참가해 ‘테란의 황제’라 불리는 임요환선수와 스타크 한판 승부를 벌였다. (본지 1월 13일 27면 참조)

李군은 저그가 어떻게 저글링(돌진)하는지, 테란이 어떻게 생겼는지 모른다. 다만 각 종족이 내는 제각기 다른 소리를 먼저 외운 후, 전투 중의 비명 소리 등을 듣고 적의 위치와 전세를 파악한다. 프로 게이머와 맞대결할 만큼 대단한 실력은 아니지만 소리만 듣고 게임을 한다는 점에서 놀랄만한 일 임에 틀림없다.

스타크로 세상을 감동시킨 두 사람의 대결에 승패는 중요하지 않았다. 경기 규칙에 따라 임 선수도 李군과 마찬가지로 3분동안 안대를 쓰고 미니맵을 가리고 경기에 임했다. 3분이 지날 무렵 안대를 벗자 임 선수는 어이가 없다는 듯 웃기만 했다. 덩달아 관중들도 웃었다.

앞이 보이질 않으니 경기가 제대로 될 리 만무했다. 미네럴 채취는 고사하고 일꾼(SCV)들이 방황만 하고 있을무렵, 상대가 저글링 6기로 공격을 가해왔다. 사람들은 놀랬고, 더욱 놀란건 암울한 임 선수의 표정이었다.

하지만 위기를 극복한 임 선수가 20여분만에 경기를 마무리 지었지만
행사장을 가득 메운 관중들은 이군에게 아낌없이 박수와 환호성을 보냈다

경기 후 임 선수는 “경기내내 말이 안된다고 생각했다. 혹시 보이는게 아닌지 의심했고, 농락당하는 기분도 들었다. 내가 진 경기였다”며 李군의 실력에 혀를 내둘렀다.

李군은 선천적 시각장애우는 아니었다. 예정일보다 세상에 일찍 나오는 바람에 인큐베이터 신세를 지게 됐고, 이때 인큐베이터 내 산소 과다 사고로 실명했다. 지난 2000년 맹학교 선배로부터 스타크를 접하게됐고 이후 밤을 새워가며 남보다 몇배의 노력끝에 지금의 실력까지 도달하게 됐다.

어릴때부터 남보다 청각이 발달하고 음감이 뛰어나 음악에 재능을 보인 李군은 앞으로 작·편곡을 하는 방향으로 진로를 나아갈 생각이다. 건강을 걱정하는 부모님과의 약속으로 이날 경기가 자연스레 스타크와 고별전인 셈이 됐다.

李군에게 은퇴(?)가 서운하지 않냐는 질문을 하자 “괜찮다”며 밝게 웃어보였다. 오히려 “최선을 다해 공격을 해도 끄떡없는 걸 보고(?) 역시 임요환이라 느꼈다. 아쉽지만 이제 후회는 없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그는 “훗날 뛰어난 음악가가 되면 그때 게임음악에 도전해 게임과 인연을 계속 맺고 싶다”며 당찬 포부를 밝히면서 "장애인이니까 못할 것이라고 여겨지는 것에 하나하나 도전하는 것도 재미있기에 시련과 고통이 따르더라도 자신감을 갖으라"고 조언도 덧붙였다..

승패를 떠난 두 사람의 아름다운 명승부에 관중들은 뜨거운 박수로 화답했다.

이병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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